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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과 간계의 충돌 현장 적벽가
15-07-05 18:12


『적벽가』 이본, 국립중앙박물관오늘날 공연되고 있는 판소리 다섯 바탕 중 『춘향가』, 『흥보가』, 『심청가』, 『수궁가』 등 네 바탕은 우리 민족 전래설화가 기반이 되어 사설이 형성되었지만, 『적벽가』는 중국소설 『삼국지연의(三國
志演義)』의 내용에서 가려 뽑은 이야기로 사설이 이루어졌다. 『삼국지연의』는 우리나라 고전작품은 아니지만, 조선시대 후반기 우리 선인들은 이 소설을 널리 탐독하며 큰 관심을 보였고, 판소리 사설로 구성하여 계속 구연해왔다. 판소리 발전과정을 통해 볼 때, 대체로 14~5편의 판소리 작품이 구연되어 오다가 19세기 후반 신재효(申在孝) 선생에 의해 판소리 여섯 마당이 정립되는데, 이 속에도 중국소설에서 사설을 취해 온 『적벽가』가 함께 들어 있으며, 오늘날 공연되고 있는 다섯 작품 속에도 빠지지 않고 생명력을 유지하여 관객의 호응을 얻고 있는 것은 크게 주목해야 할 사실이다.

『삼국지연의』가 우리나라에서 출판된 상황을 보더라도 원문 그대로 판각(板刻) 출판되었는가 하면, 또한 우리말로 번역된 판본이 출간되기도 했다. 그리고 1907년에는 전주 판각(板刻)의 우리말로 된 완판본(完板本) 『화용도(華容道)』가 출간되었으며, 거의 동일한 내용인 또 다른 『화용도』의 완판본이 전해지는데 연대를 명기하지 않았다. 소설 『화용도』는 신재효 판소리 사설집의 『적벽가』내용에 준하는 적벽대전을 중심으로 『삼국지연의』 원문에서 뽑아 번역하여 새 소설로 꾸민 것인데, 끝부분에서 관운장이 조조를 놓아준 화용도 이야기로 끝맺지 않고, 그 이후의 전쟁 이야기 일부를 간략하게 추려 덧붙인 것이 판소리 사설과의 차이점이다. 나아가 후대 신활자 본으로 한문 원문에 우리말 토(吐)를 단 현토본(懸吐本) 『삼국지연의』가 출간되기도 했다.

이런 사실들을 종합해볼 때 『삼국지연의』의 내용은 우리 민족 정서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소설이 처음 우리나라에 수입되었을 당시의 역사 기록이 또한 흥미롭다. 조선시대 중기 선조(宣祖) 2년(1569) 2월에 임금이 신하에게, “장비(張飛)가 한 번 소리치니 일만 군사가 놀라 달아났다는 말은 정사(正史)에 안 보이는데 『삼국지연의』에 나타나 있다고 들었다” 하고 질문한 내용이 『선조실록(宣祖實錄)』에 실려 있다. 이 때 시독관(侍讀官) 기대승(奇大升)은 그 책이 들어온 지가 얼마 되지 않아 근래에 보았다면서, 적벽대전 등 허황한 설화를 모아 엮은 이야기이므로 임금이 읽을 책이 못 된다고 경계했다. 하지만 이미 임금이 이 정도로 관심을 가졌다면 민간에는 얼마나 널리 전파되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2014. 6. 27 판소리 기획공연 ‘득음’ 중 적벽가 공연더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나라의 체면이 크게 손상된 이후로는 한(恨)의 시대를 살아야 했던 뜻있는 지사(志士)들이 적장 목을 베는 관운장ㆍ장비ㆍ조자룡 등 천하무적 영웅들의 활동에 크게 흥분하면서 그 얘기를 널리 전파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 고전소설에는 ‘재주 높은 공명 선생 동남풍은 빌었으되’, ‘조자룡의 월강하던 청총마’, ‘장판교 장비 일성’, ‘조조의 간사한 웃음소리’, ‘관운장의 적토마’ 등등, 이 소설의 인물이나 사건이 수없이 인용되고 있다. 사실 이 얘기 속에는 상상을 초월한 지략과 계책이 있고, 또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초능력으로 적진을 휘젓는 전투 장면이 과장되긴 했어도 실감나게 표현되어 있어, 문약(文弱)에 빠진 우리 민족의 안일한 심성을 크게 자극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생각하면 이 소설에 대한 큰 관심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삼국지연의』는 이야기의 진행에 따라 한 단락씩 끊어, 제1회 제2회 등으로 회차(回次) 번호와 함께 제목을 붙이는 ‘장회소설(章回小說)’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총 120회로 그 양이 매우 방대하다. 이 중에서도 조선후기 우리 선인들은 제37회부터 제51회 사이 15회 분의 이야기를 특히 애독하며 큰 관심을 보였는데, 이 부분이 바로 ‘적벽대전(赤壁大戰)’ 내용이다. 그래서 이 부분만 떼어 『화용도』라는 고소설로 구성해 출간했고, 또 소설 전체를 번역하여 여러 권으로 분책하면서 이 부분만을 따로 한 권질(卷帙)로 묶어 적벽싸움 얘기가 널리 전파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적벽대전은 충성심에 불타는 충렬용사와 왕권을 농락하는 간웅이 대결을 펼치는 내용이다. 특별히 100만 장병을 다 잃은 간웅 조조의 몰락도주 모습을 한층 더 과장되게 표현하여, 우리 민족 열혈(熱血) 남아들로 하여금 쾌재를 외치게 꾸며 놓은 것이 판소리 『적벽가』를 부동의 위치로 끌어올린 원동력이 되었다.

원본 소설 속의 적벽싸움 이야기는 매우 복잡한 사건들이 많이 얽혀 있지만, 우리 판소리 『적벽가』는 그중에서 대체로 크게 10여 단락 장면만을 가려내어 사설을 엮었다. 1) 유ㆍ관ㆍ장 삼형제의 도원결의와 제갈공명을 세 번 찾아가 모셔오는 삼고초려(三顧草廬), 2) 조조의 큰 병력에 밀려 유비가 신야(新野)를 불태우고 강하(江夏)로 이동할 때 조자룡의 혈전과 장비의 장판교(長板橋) 호통, 3) 제갈공명의 오(吳)나라 관료들과 주유(周瑜) 설복, 4) 적벽강에서 조조가 잔치를 열고 패기 넘치는 작시, 5) 조조 군영 병사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탄식낙루, 6) 제갈공명이 동남풍을 빌고 탈출할 때 조자룡이 화살로 추격함 돛대 파손, 7) 화염에 휩싸여 아우성치는 적벽대전, 8) 도주하는 조조의 간사한 웃음, 9) 조자룡과 장비의 연이은 복병 출현, 10) 화용도에서 조조를 잡았다가 다시 놓아주는 관운장의 후덕(厚德) 등이다.

판소리 『적벽가』의 사설 내용을 원본 소설과 비교해보면 이미 우리 문학작품으로 승화되었음을 알게 된다. 앞에서 열거한 열 가지 내용 중에서 다섯 번째의 조조 군영 병사들 탄식 장면은 『삼국지연의』 본문에 나타나 있지 않은 내용이다. 이 부분을 매우 길게 그리고 여러 가지 해학적인 표현으로 재미있게 구성하여 전쟁 이야기로 일관되어 있는 전체 줄거리에 큰 변화를 주는데, 신재효 판소리 사설집에서부터 이미 삽입되었다. 그리고 여덟 번째 조조의 도망 장면에서도 원문과는 크게 다르게 많은 재담을 꾸며 삽입하여 관객들의 흥미를 돋운다. 이같이 우리 판소리 예술로 정착된 『적벽가』 사설은 원본에서 멀어져 새로운 문학작품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예전에 우리 국어교과서는 국정(國定)으로 단일하게 출판되어왔다. 그 시절 국어교과서에 실리는 고전소설 작품은 판각되어 출간된 판본소설이 중심이었다. 그런데 요즘에는 국어교과서를 검인정으로 다양하게 출간하면서 판본소설이 아닌 판소리 사설도 교과서에 실리고 있으니, 이러한 추세는 판소리 예술의 위상을 한층 높이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본다. 따라서 판소리 『적벽가』 사설이 비록 중국소설의 내용을 취해 구성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 교육에 소홀함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적벽가』의 사설은 판소리 다섯 바탕 중 유일하게 중국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내용에서 비롯됐지만 원문과 다른 많은 재담을 꾸며 넣어 우리 판소리 예술로 정착했을 뿐 아니라 새로운 문학작품으로 다시 태어났다.                             - 글 김현룡 (건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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