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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순을 본받으려면 선대 국왕을 본받아라
15-07-05 21:06

篤孝
정조가 편찬한 『갱장록』은 조현명의 『조감(祖鑑)』, 이세근의 『성조갱장록(聖朝羹墻錄)』, 정항령의 『상훈집편(常訓輯編)』을 참고했다. 이들은 모두 영조 대에 편찬된 책이다. 1731년(영조 7) 이세근이 90조로 된 『성조갱장록』을 올리자, 영조는 이를 읽으면 선왕을 추모하는 마음이 더욱 절실해진다고 하였다. 정조가 『갱장록』을 편찬한것은 영조의 마음을 따르려는 것이다.
『갱장록』의 셋째 편은 국왕의 지극한 효성을 말하는 ‘독효(篤孝)’이다. 효 중에 제일은 살아계신 부모를 극진히 모시며 뜻을 어기지 않는 것이다.
정종은 왕위에서 물러난 태조가 머물 집을 짓고 덕수궁(德壽宮), 승녕부(承寧府)라 불렀다. 태조의 장수와 평안을 기원하는 이름이었다. 세종은 왕위에서 물러난 태종을 모실 때 깍듯이 예의를 갖추었고, 이를 본 명나라 사신은 현명한 국왕이라 칭찬했다. 문종은 세자 시절에 후원에 앵두나무를 심어놓고 앵두가 열리면 세종에게 올렸다. 세종은 세자가 올린 앵두 맛이 밖에서 진상한 것보다 낫다고 했다. 원종은 열세 살 때 임진왜란을 만났다. 선조가 영변으로 피신하라고 하자, 원종은 부자가 함께 죽지 못하면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한다고 거절했다. 선조는 원종을 가상하게 여겨 항상 자신의 측근에 두었다. 경종은 세자 시절에 온천으로 가는 숙종을 강가에서 전송하였다. 경종은 국왕의 행렬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다가 얼굴에 걱정하는 기색을 드러냈다.
영조는 어릴 때 숙종을 뵈면 반드시 꿇어앉았고 물러가라는 명령이 없으면 그대로 있었다. 영조의 생모인 숙빈은 꿇어앉는 영조를 위해 넓은 버선을 만들어주었다.
국왕은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장례를 극진히 했다. 태종은 태조가 돌아가시자 국왕은 3년상을 지내지 않는다는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가장 무거운 상복을 입고 3년상을 지냈다. 세종은 모친의 장례를 극진히 했다. 원경왕후가 돌아가시자 태종은 세종에게 하루를 한 달로 계산하는 옛 제도를 따르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세종은 역사서에서 이 제도를 볼 때마다 무안하여 얼굴이 붉어졌다고 했고, 태종은 세종의 효성에 눈물을 흘렸다. 인종은 중종의 병간호를 극진히 했다. 중종이 돌아가시자 인종은 왕위에 오르려 하지 않았고, 국왕이 된 직후에는 국상과 관련된 일이 아니면 대신에게 위임하였다.

숙종 대에 처음 편찬된 『선원계보기』선조의 집터를 보존하거나 묘소를 돌보는 일도 효였다. 현종은 개성의 태조 집터에 세운 목청전을 수리하고, 남문 밖의 집터에는 관리를 파견하여 수리하게 했다. 영조는 영흥에 있던 환조의 옛집에 비각을 세웠다. 이곳은 태조가 태어난 집이었다. 효종은 매년 왕릉을 참배하던 관례를 따라 봄에는 음력 2월과 3월에, 가을에는 7월과 8월에 왕릉을 참배했다. 숙종은 꿈에 본 효종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남아 있자 눈물을 흘렸고 효종의 영릉을 방문했다. 영조는 원종의 장릉을 교하로 옮기면서 옛 왕릉의 송백나무 묘목을 가져가 새 왕릉에 심었다. 이는 효종이 심은 나무로, 영조가 효종의 자취를 느꼈듯이 자신의 후손
도 자기 자취를 느끼기를 바라서였다.
선왕의 어진을 모시고 잘 갈무리하는 일도 있었다. 정종은 환조의 어진을 모신 건물을 세우고 계성전(啓聖殿)이라 했다. 예종은 환조 이하의 어진을 선원전에 모셨고, 성종은 소헌왕후, 세조, 예종의 어진을, 중종은 정종 부부의 어진을 선원전에 모셨다. 인조는 세조와 원종의 어진을 남별전에 모셨다. 남별전은 숙종 대에 영희전이 되었다.
돌아가신 선조를 국왕으로 추존하거나 묘호를 올리는 것도 효였다. 태조는 자신의 4대조를 국왕으로 추존하여 종묘에 모셨다. 태조의 고조부는 목조, 증조부는 익조, 조부는 도조, 부친은 환조가 되었다. 성종과 인조는 생부를 국왕으로 추존하여 종묘에 모셨다. 성종은 생부인 덕종을 종묘에 모시면서 예종의 윗자리에 두었는데, 덕종이 세자로 있을 때 예종은 대군이었음을 반영한 때문이었다. 숙종은 노산군(단종)을 복위시켰다.

이는 세조가 단종을 태상왕으로 높이고 한 달에 세 번 문안 인사를 올렸던 행적을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영조는 생모인 숙빈 최씨를 높이는 일에 정성을 다했다. 영조는 숙빈에게 육상이란 시호를 올리고 사당을 육상궁, 묘소를 소령원이라 하였다. 영조는 자신이 어릴 때 돌아가신 숙빈을 몹시 그리워했다. 영조는 아침저녁으로 영취정에 가서 땅에 엎드려 육상궁을 바라보았고 눈물을 흘리며 돌아왔다. 정조가 매달 사도세자의 경모궁을 방문한 것은 영조의 행적을 본받은 것이다.
선조의 행적과 왕실 족보를 정리하는 일도 중요했다. 세조는 태조, 태종, 세종, 문종의 훌륭한 말씀과 정치를 기록한 『국조보감』을 편찬했다. 세종의 뜻을 계승해서였다. 숙종은 세조가 편찬한 『국조보감』에 세조, 예종, 성종의 덕행과 언행을 추가한 『칠조보감(七祖寶鑑)』을 편찬하고 서문을 작성하였다. 이후 선왕이 사망하면 보감을 편찬하는 일이 관례가 되었다. 효종은 세종과 성종의 정치가 가장 훌륭한 것으로 보고 두 국왕의 실록에서 좋은 제도를 뽑은 책을 아침저녁으로 열람하였다. 효종은 역대 국왕의 지문(誌文)과 행장을 모은 『열성지장(列聖誌狀)』을 편찬했다.
덕종의 지문과 원종의 행장이 존숭되기 전에 작성된 것이라 미진한 점이 있어서였다. 숙종은 낭선군이 『선원계보(璿源系譜)』를 올린 것을 계기로 선원각에 소장된 보첩들을 살펴보고 『선원계보기략』을 편찬하였다. 이는 왕실의 계보를 간략하게 정리한 책이었다.

영조의 생모 숙빈을 모신 육상궁(현재의 칠궁)조선 국왕의 효성은 다양하게 나타났다. 부모님이 살아계시면 정성껏 모시며 그 뜻을 따르고, 돌아가시면 장례를 극진히 하고 묘소를 돌보았다. 국왕의 효성에는 어진을 잘 모시거나 국왕이나 왕비가 아닌 부모를 추존하는 일도 있었고, 국왕의 언행이나 치적을 기록으로 정리하기도 했다. 정조는 후대의 국왕들이 이런 선왕의 행적을 따라 효를 실천하기를 기대했다. 선왕을 본받는 일은 바로 요순(堯舜)을 본받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 글 김문식(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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