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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 여성들의 눈물, 심청이야기
15-07-05 21:10

조선후기에서 일제강점기로 이어지는 시기, 서민 가정 안방구석에는 필사본 『심청전』 한 권씩이 놓여 있었다. 이렇게 서민 여성들이 『심청전』에 큰 관심을 가진 것은 그 속에 눈물이 흐르도록 하는 힘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후기 우리 서민 여성들은 먹고살기가 어려워 자식을 굶기면서 울었고, 혹독한 시집살이에 몸이 지쳐 울기도 했다. 이와 같이 괴롭고 슬플 때 한 번 목 놓아 울어버리면 무한한 위안을 받고 새로운 용기와 힘을 얻게 되는데, 심청이야기 속에는 곽씨부인ㆍ심봉사ㆍ심청 세 인물이 연속으로 이어 울어, 읽고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눈물이 절로 쏟아지도록 도와주는 매개체로서의 구실을 잘 해냈다.
「심청젼」 필사본 (작자·연대 미상)심청이야기는 고대 효행설화가 바탕이 되고 불교의 인과응보(因果應報) 관념과 용신숭배(龍神崇拜) 사상 등이 영향을 미쳐 줄거리가 형성되었다.
판본(板本) 소설로는 서울에서 판각(板刻)된 경판본(京板本), 전주에서 판각된 완판본(完板本), 그리고 안성에서 판각된 안판본(安板本)까지 간행되었고, 후대의 신 활자본으로도 여러 서관(書館)에서 다투어 출판했다. 이와 같이 다양하게 출판
된 것은 많이 팔려나간 것을 의미한다. 또한 판소리 사설로는 신재효(申在孝) 판소리 사설집에 실린 것을 필두로, 여러 명창들이 나름대로의 바디를 만들어 특유의 득음으로 구연(口演)해 서민 여성들의 많은 호응을 얻었다.
고대 설화 중 심청이야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설화는 『삼국사기』 권5에 실린 연권(連權)의 딸 ‘효녀지은(孝女知恩)’ 이야기인데, 『심청전』의 눈물은 이 설화에서부터 시작된다. 지은은 외동딸로 장님인 홀어머니를 봉양하느라고 나이 32세가 되도록 시집도 못 간다. 남의 집 품팔이를 하거나 구걸을 하여 홀어머니를 봉양했지만 도저히 좋은 음식을 마련해 드릴 수 없자, 마침내 부잣집에 종으로 자기 몸을 팔아 쌀 10여 석을 받아 그 집에 맡겨두고, 일을 마친 다음 조금씩 가지고 돌아와 모친께 기름진 쌀밥을 대접했다. 이러고 며칠 지나니 모친은 딸에게, “전날은 밥이 거칠어도 맛이 있고 마음이 편하더니 며칠 전부터 밥이 기름지고 좋으나 맛이 전만 못하고 칼로 가슴속을 오려내는 것같이 아프니 웬일이냐?” 하고 물었다. 그래서 사실을 알려 드리니 모친은 자신 때문에 딸을 남의 집 종으로 팔리게 했으니 죽는 것만 못하다고 하면서 통곡을 했고, 딸도 함께 크게 울어 그칠 줄 몰랐다.
이어 모녀의 통곡소리를 들은 화랑(花郞) 효종(孝宗)이 사실을 알고는 낭도들과 함께 곡식을 내어 도와주었고, 임금이 알고 집과 곡식을 하사하면서 부역도 면제하고 종에서 벗어나게 해주었으며, 그 마을을 ‘효양방(孝養坊)’으로 지정하여 표창해 주었다는 내용을 첨가했다. 이 후반 부분은 효행에 대한 보상(報償)을 명시한 내용으로 주목을 요한다. 효행은 동양사상의 근간인 유학(儒學)에서 모든 행실의 근본, 즉 백행지본(百行之本)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그 보상은 논의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많은 효도 얘기에서 보상을 결부시키고 있는 것은 효행이 결코 쉽지 않으므로 권장하려는 교훈 의도를 반영한 것이다.
한편, 지은이야기에 대하여 효도의 본질 문제를 언급한 기록이 있다. 『삼국유사』 권5에 ‘빈녀양모(貧女養母)’라는 제목으로 지은이야기를 약간 다르게 표현해 싣고는, 딸이 울면서 ‘구복(口腹)’의 봉양만 생각하고 ‘색난(色難)’을 놓쳤다고 한탄했다는 말을 덧붙였다. ‘구복’은 좋은 음식으로 부모를 봉양한다는 뜻이며, 심청이야기와는 깊은 관련이 없다. 하지만 ‘색난’은 부모 얼굴을 항상 살펴 늘마음을 기쁘게 해드려야 하는데 이런 효도는 정말 어렵다는 뜻으로, 심청이야기와 깊이 연관되어있다. ‘색난’이란 말은 『논어』에서 공자(孔子)가 효도를 정의한 말인데 효의 근본을 의미한다.
소설이나 판소리 사설의 심청이야기는 두 단락으로 나누어진다. 먼저 눈먼 부친을 효도로써 봉양하다가 더 큰 효도를 위해 심청이 물에 빠져 죽는 효행단락이 있고, 이어지는 단락에는 부친이 눈을 뜨는 부처님의 영험 얘기와 함께 심청이 다시 살아나와 황후가 된다는 효행 보상 이야기가 합쳐져 있다. 첫 단락에서 심청이 당면한 상황은 몸을 팔아 죽지 않는 한 공양미 300석을 마련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공양미 300석을 시주한 다음 눈먼 부친을 두고 죽었으니 부친은 딸을 팔았다는 죄책감에 매우 괴로워했을 것이다. 여기에서 심청은 부친의 마음을 아프게 했으니 ‘색난’에 비추어 볼 때 효도가 되지 못한다고 하는 견해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죽지 않고 살면서 공양미 300석을 시주하지 못한 채 좋은 음식만 마련하여 잘 모셨을 경우, 인간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절대자인 부처님을 속여 앉은뱅이가 될 것이라면서 탄식하는 부친의 괴로움은 몇 갑절 더한 고통에 해당한다. 이 고통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효녀 부친이라는 찬양을 받으면서 딸을 팔았다는 죄책감을 갖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부모에게서 받은 몸이니 부모를 위해 희생하는 것을 효행의 으뜸으로 여겼고, 이를 실행한 심청이야말로 ‘색난’의 효도를 다했다면서
크게 찬양했다.
한편 효도실행단락에서, 효행에 더하여 부처님을 연관시켜 그 영험의 신이(神異) 관념을 깊숙이 투입해 놓은 복선구조는 매우 큰 관심의 대상이었다. 불교는 삼국시대 이래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명실 공히 민족종교로 자리 잡았고, 거기에 신선(神仙) 사상의 신기한 행적이 결부되어 부처님의 영험이 현실로 실현되었다는 일화가 수도 없이 기록되어 전한다. 이러한 얘기들에 익숙해 있는
민간 서민들은 부처님의 영험을 결코 이야기만이 아닌 현실로 확신하는 경향이 있어서, 시주를 위해 몸을 바친 심청에게 반드시 영광스러운 보답이 있을 것으로 믿으며 눈과 귀를 기울여 애타게 결말을 기대하도록 얽어놓았다.
이후 뒤 단락에서, 부처님 영험의 실현으로 눈을 뜨게 되는 영광과 함께, 죽었던 심청이 다시 살아나 부친과 상봉하는 감동을 표현하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 물에 빠진 심청의 구제 수단으로 용신숭배(龍神崇拜) 사상을 반영해 놓은 것 역시 의미가 매우 크다. 용은 물을 관장하는 제왕으로서 특히 비를 내리게 하는 일을 담당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농경(農耕)으로 살아온 우리 민족 정서 밑바닥에 밀착되어 숭배의 대상이었고, 또한 용은 동방(東方) 상징의 동물이어서 대륙 동쪽에 치우친 우리민족은 용을 우리 것으로 믿었다. 고려시대 왕의 혈통을 용손(龍孫)으로 규정한 것도 이와 같은 관념에서 이루어졌었다.
이런 바탕 때문에, 물에 빠진 심청을 용궁의 꽃으로 만들어 황후로 재탄생시키는 변화 과정에서, 민족 심성 기저(基底)에 뿌리박혀 전래되던 오랜 정서를 잘 이용하여 은근히 숨겨 비현실을 현실로 전환했는데도, 독자나 관객들은 비현실이라 느끼지 못하고 환호했다.
나아가 감히 상상도 하기 어려운 황궁 뜰에서 죽었던 딸을 만나고, 겸하여 눈을 뜨는 장면까지를 한 곳에 합쳐 열광하게 했다. 이처럼 앞에서 실컷 울려놓고 맺힌 한을 발산하게 하는 장면들을 겹쳐 한꺼번에 확 터뜨리는 구성은 교화의도를 강조할 때 주로 사용하는 방법인데, 이방법을 활용하여 효행 권장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글 김현룡(건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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