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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은사와 보우대사
15-07-06 15:30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위치한 봉은사는 본래 신라 원성왕 10년(794)에 연회(緣會) 국사가 창건한 절로, 당시에는 견성사(見性寺)로 불렸다고 한다. 고려 이후에는 사적이 전해지지 않아 분명치 않고, 이후 연산군 4년(1498)에 정현왕후가 성종을 모신 선릉의 능침사찰로 능 동편에 있던 견성사를 중창하고 봉은사(奉恩寺)로 개명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능침사찰이란 선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능 옆에 세운 사찰로, 나라에서 세우고 관리하는 일종의 왕실 직할의 사찰을 말한다. 원당(願堂) 또는 원찰(願刹)이라고도 하는데, 불교가 탄압받던 조선시대에도 왕실의 보호 아래 있었기에 다른 사찰보다 나은 여건에서 존립할 수 있었다.
보우대사(普雨大師, 1510~1565)는 15세에 금강산 마하연에서 비구계를 받고 24세부터 10년간 금강산에서 수행하며 득도하였다. 그 후 39세(명종3년, 1548)에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명을 받아 봉은사 주지로 부임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봉은사는 보우대사와 깊은 인연을 가지고 숭유억불시대인 조선의 불교계를 중흥시키는 파란 많은 대역사를 주도하게 된다.
당시 피폐했던 불교계는 봉은사를 중심으로 문정왕후의 독실한 불교신앙과 보우대사의 선도적인 불교 중흥 활동이 어우러져 선·교 양종이 부활되어, 교단이 정비되고 승과가 다시 실시되는 등 일련의 부흥기를 맡게 된다. 하지만 이 기간 중 교계를 주도하던 대사는 불교를 배척하는 조정 대신들과 유생들에게 요승으로 몰리며 온갖 수모를 겪어야 했다.
보우대사는 본래 성품이 소탈하고 몸이 쇠약하여 구름 속 총림에 몸을 숨기고 사람들 앞에 나가지 않으려고 했는데, 뜻하지 않게 문정왕후의 명을 받아 봉은사 주지로 부임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대사는 끝내 사양하지 못하고 주지로 부임하게 됨을 부끄럽게 여기며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병 앓은 뒤, 겨우 화두 들기를 시작했는데 왕후의 조서 구름 깊은 언덕에 온 소식 놀라며 들었노라. 담장을 넘어 도망치자니 공손한 도리가 아니라는 비난을 들을까 두렵고 귀를 씻고 못 들은 것으로 하자니 세상을 피해 산다는 허물을 받게 됨이 부끄럽다  멀리서 온 사신은 오경에 범 같은 석장으로 재촉하여 북풍 불고 잔설 덮인 양주 땅을 지나왔네. 석양에 얼음 위 청담의 물 건너서 선원에 들어오니 나보다 위에 계신 스님들께 부끄럽기만 하여라. 病後纔能學擧頭 驚聞丹詔入雲丘  踰墻恐被非恭譴 洗耳慚成彼世尤  星使五更催虎錫 朔風殘雪過楊州  夕陽永渡淸潭水 入院難堪愧上流 『허응당집 / 높은 산 천년을 이어온 큰 가람에 조서 받들고 향 품에 넣고 불감에 오르니 일천 잎새 보련은 묘한 모습으로 피어나고  몇 소리 맑은 경쇠 현묘한 이야기 하소연하네. 몇 소리 맑은 경쇠 현묘한 이야기 하소연하네. 바람은 향로 연기 끌어가 이미 산바람 빛이 되었네. 이것들 또한 십분 비밀 누설된 것인데 산승이 왜 다시 입을 나불거리겠는가. 喬山千載大伽藍 奉詔懷香上佛龕   千葉寶蓮開妙相 數聲淸磬訴玄談  雲侵曉殿初飛雪 風引爐煙已作嵐  此亦十分成漏洩 山僧何更說喃喃 『허응당집』

보우대사는 봉은사에 도착한 이튿날 새벽 오경(五更)에 불전에 올라 향을 사루고 예불을 마치자, 한 스님이 법문을 청하였다. 대사는 다음의 게송을 지어 스님들에게 보여 주었다.

천 잎의 보련과 맑은 경쇠소리, 그리고 향 연기를 비롯한 이 모든 색·성·향·미·촉·법 육진(六塵)의 경계가 그대로 부처님의 법음(法音)이요, 진여의 무정설법(無情說法)이니, 또다시 설법할 필요가 있겠냐는 것이다. 중생에게는 육진이 티끌의 경계로 번뇌를 일으키는 대상이지만, 본래는 낱낱이 청정한 진여의 세계이니 어찌 무정설법은 들으려하지 않고 유정설법을 청하느냐는 대사의 가르침이다. 일체만유가 진여 아닌 것이 없으니 눈에 가득한 저 청산이 본래면목이요, 눈에 보이는 그대로가 깨달음이며, 손에 닿는 것 그대로가 진실인 것이다.

보우대사에 대한 유림들의 배척은 봉은사 주지로 임명되어 교단 부흥의 터전을 마련한 명종 3년(1548) 12월 15일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사실상 선·교 양종을 다시 세우는 일은 보우대사의 불교중흥을 위한 굳은 의지와 문정왕후의 독실한 불심에서 비롯된것이었다. 대사는 봉은사 주지로 있으면서 불교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폐지된 교단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이 가장 시급한 문제임을 직시하였고, 이를 문정왕후의 독실한 불심을 통해서 실현 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문정왕후 또한 대사가 불교를 다시 일으킬 수 있는 적임자임을 알아보고 역사적인 선·교 양종의 복립을 명한 것 이었다.
 
허응당 보우대사 동상

보우대사는 42세에 끊어졌던 선종판사의 명맥을 이어 104대 판선종사도대선사(判禪宗事都大禪師)로 부임하고 불교중흥을 선두에서 지휘하여, 명종 7년(1552)부터 승과가 다시 열리고 선종과 교종에서 3백여 명의 승과합격자인 대선(大選)을 선발하여 서산대사, 사명대사를 비롯한 수 많은 불교의 종장들이 배출되었으며, 도승제(度僧制)를 다시 시행하여 5천여 명의 정규 스님을 양성하였다. 8년간 봉은사를 중심으로 일어난 대불사로 불교계는 새 활력을 되찾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유림의 배척은 매우 거셌다. 조정 대신과 홍문관·사헌부·사간원을 비롯하여 성균관 및 기타 지방 유생들의 양종 설치와 승과 반대는 연일 지속되었다. 결국 대사는 요승이라는 누명을 쓰고 온갖 배척을 한 몸에 받아 46세에 선종판사 봉은사 주지를 사임하시고, 서산대사에게 후임을 맡기고 청평사로 물러나 7년간 주석하였다. 이 기간중에는 대사를 모함하는 참소가 한 건도 없었으니, 배척의 대상은 보우대사가 아니라 사실상 불교 중흥이었음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보우대사의 불교사상은 평소 임금과 나라를 사랑하고 백성을 사랑하는데로 이어지고 있었다. 결국, 보우대사는 문정왕후의 천릉역사로 인하여 청산에 은거하는 간절한 소망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승단의 책임을 맡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또다시 척불세력의 지탄을 한 몸에 받아야 했으니 참으로 비운이 아닐 수 없었다.
현재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에 자리 잡고 있는 2개의 왕릉인, 선정릉은 조선 9대 왕인 성종과 계비인 정현왕후 윤씨의 능인 선릉과 조선조 11대 왕인 중종의 능이다. 본래 중종의 능은 경기도 고양군 원당에 첫 번째 계비인 장경왕후 윤씨의 능인 희릉과 함께 있었으나, 문정왕후 윤씨가 풍수지리상 불길함을 내세워 서울의 삼성동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결국, 대사는 53세에 천릉과 관련되어 임명되었던 도대선관교의 직위를 삭탈 당하고 선종판사도 병으로 사임하였으나, 문정왕후의 간청으로 다시 맡으셨다. 이후, 명종20년(1565년) 문정왕후가 승하한 후에 전국 유생들의 참소가 연일 계속되어 극에 달하자 마침내 승직마저 삭탈당하고 제주로 유배되셨으며, 그해 제주목사 변협에게 위해를 당하여 세수 56세, 법랍 49세를 일기로 순교하셨다.
이듬해에 양종과 승과가 또다시 폐지되었으나, 보우대사께서 봉은사를 중심으로 부흥시켰던 선교 양종과 승과를 거쳐 배출된 훌륭하신 스님들은 대사의 법을 이어 온몸을 바쳐 임진왜란의 국난을 극복하고 오늘날까지 부처님의 지혜광명의 법등을 이 땅에 밝혀 불교의 법맥이 끊기지 않고 면면히 이어지게 된 것이다.
사명대사는 보우대사의 문집인 『허응당집』을 발간하고 발문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생각하건대 우리 대사께서는 동방의 외지고 좁은 땅에 태어나시어 백 세 동안 전해지지 못 했던 도의 실마리를 열어 오늘날 배우는 자들이 이에 힘입어 그 돌아갈 바를 얻게 하시고 이 도로 하여금 마침내 사라지고 끊어지지 않게 하셨으니, 스님이 안 계셨더라면 영산의 풍류와 소림의 가락이 거의 멈추어 세상에 들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출처: 한국문화재재단  글˚박영기 (철학박사, 동인문화원 부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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