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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잔치 국가 원로를 위한 연향
15-07-06 15:35

1.<<기사계첩>> <경현당석연도> 1719년 숙종의 기로소 입소를 기념하여 기로신들에게

내린 연회를 그린 그림. 덧마루 위에 전상악이, 전정에 헌가 악대가 배치되어 있다.
무대의 가운데에서 무동 두 명이 <초무정재>를 추고 있다.

국가원로와 기로소(耆老所)
어떤 일에 오랜 세월 종사해서 경험과 공로가 많고 덕망이 높은 사람을 일러 ‘원로(元老)’라 한다. 원로란 어느 날 갑자기 혜성처럼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연륜과 덕이 높아지고 인품을 갖추어야 형성된다. 젊은 혈기로 판단하고 수행할 수 있는 일과 원로의 혜안으로 과묵하게 진단하는 내용의 무게는 같지 않다. 원로란 그 존재만으로도 든든하게 한다. 한 사회에 훌륭한 다수 원로가 포진하고 있다면, 그 사회는 건강하게 성장해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원로를 위한 좋은 제도가 있었다. 관품 정2품 이상, 나이 70세 이상의 문신을 예우하기 위해 설치한 친목 기구인 ‘기로소(耆老所)’가 그것이다. 문신만이 아닌, 조선의 왕도 기로소에 들었다. 조선의 왕으로는 태조가 60세에 처음으로 들어갔다. 왕의 신분이므로 좀 이른 것이다.
숙종은 이보다 한 해 빠른 59세에 들어갔다. 기로소에 들 것을 제안 받은 숙종은 처음에는 이를 물리쳤다. 이른 나이에 기로소에 들어가는 것이 미안해서였다. 결국 여러 차례 청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들 것을 수락하였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가 이미 기로소에 들어간 적이 있으니 선왕을 따르는 뜻이 되고, 노인을 숭상하는 풍속이 되기 때문에 받아들였다. 재위 45년 되는 1719년에 숙종은 기로소에 들어갔다. 경사를 맞아 중죄인이 아닌 사람에게 사면령을 내리고 관직에 있는 사람은 품계를 올려 주었으며, 기로신(耆老臣)들에게는 잔치를 내려 주었다.

경현당에서 베푼 기로를 위한 연향
세자와 신하들은 숙종의 기로소 입소를 축하하는 진연(進宴)을 올려 기쁨을 나누고자 했다. 그러나 숙종은 당시 전염병이 심하고 백성이 어려운 시기에 잔치를 받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여 미루고, 우선 기로신들에게 잔치를 내리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1719년 음력 4월 18일, 꽃향기 그득한 초여름날, 숙종은 기로신들을 위한 연향을 베풀었다. 장소는 경희궁의 경현당(景賢堂)이었다.
숙종은 익선관(翼善冠)과 곤룡포(袞龍袍)를 갖추어 입고 나왔다. 장악원의 연주자들은 홍주의(紅紬衣)를 갖추어 입고 장엄한 <여민락 만>을 연주하였다. 세 차례의 예행연습을 거친 후라서 음악은 연습 때에 비해 더욱 훌륭했다. 협률랑의 신호에 따라 삭고(朔鼓)를 한 번 치고, 응고(應鼓)에 이어 축(祝)을 친 후 건고(建鼓)를 세 번 두드리자 비로소 연주가 시작되었다. <여민락 만>의 연주에 맞추어 이동하는 행렬은 왕의 위의를 드높였다. 왕의 행렬은 숭덕문을 거쳐 나가 경현당에 도착하였다.
경현당의 중앙에는 왕이 앉을 어좌(御座)를, 어좌의 왼편에는 왕세자의 자리를 마련하였다. 70세 이상의 원로 10명이 잔치에 참여하였다. 이날의 잔치는 왕이 기로신들에게 베푸는 것이라 평소의 진연보다 더 푸짐하게 차렸다. 내시가 왕에게 꽃을 올렸고 왕세자의 스승인 보덕(輔德)은 왕세자에게 꽃을 올렸다.여러 기로신에게도 각각 꽃을 나누어 주었다. 모두가 잔치의 주인공들이기 때문이다.

이미지 설명:'기사계첩','기사사연도'경현당에서 숙종이 내린 잔치에 참여한 후 기로소로<br /> 이동하여 마련한 2차 모임. 뜰에는 처용무 반주를 하는 장악원의 악대가 보인다. 대청의 중앙에는 숙종이 하사한 은배가 붉은 보자기에 쌓인 채 놓여져 있다 . 기로신 10명이 잔치의 주인공들이다.
<<기사계첩>> 중의 <기사사연도> 경현당에서 숙종이 내린 잔치에 참여한 후
기로소로 이동하여 마련한 2차 모임. 뜰에는 처용무 반주를 하는 장악원의 악대가 보인다.
대청의 중앙에는 숙종이 하사한 은배가 붉은 보자기에 쌓인 채 놓여져 있다 . 기로신 10명이
잔치의 주인공들이다.

 기로들을 위해 연주된 음악
음악 감독인 전악은 악장(樂章)을 올리라는 명을 받고 <유천지곡> 을 노래하였다. 노래를 마치자 왕 을 위한 첫 번째 술잔이 준비되었 다. <천년만세>를 연주하는 가운데 소년 무용수인 무동(舞童)이 들어와 <초무>를 추었다. 이때 기로신들 에게도 술이 고르게 돌아갔다. 다시 <오운개서조>가 연주되는 가운데 만두가 올려졌고, 올리기를 마치자 연주를 그쳤다. 탕을 올릴 때에도 역시 음악이 연주되었다. 둘째 잔을 나누는 순서가 되자 무동이 들어 와서 <아박무>를 추었다. 상아로 만든 아박을 들고 추는 춤이다. 춤 반주 음악은 <정읍만기>였다. 다시 탕을 올리자 <청평곡>을 연주하였 다. 세 번째 술잔을 올릴 때에는 무동이 <보허자령>에 맞춰 <향발무> 를 추었다. 쇠로 만든 향발을 양손에 들고 추는 춤이다. 네 번째 술잔 을 올릴 때에는 <천년만세>의 반주에 맞추어 <무고정재>를 추었다. 무고(舞鼓)를 세워 놓고 치면서 추는 춤이다. 탕을 바칠 때에는 <낙양 춘>을 연주하였다.
네 번째 술잔을 나누기까지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왕은 잠시 휴식 을 취하고자 했다. 어좌 앞에 있는 푸른 휘장이 내려졌다. 왕이 잠시 숨을 고르자 다시 휘장이 올려지고 연향이 계속되었다. 이때 내시는 왕이 기로들을 위해 마련한 은배(銀杯)를 준비하였다. 다섯 번째 잔은 은배로 술을 돌리도록 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드디어 숙종이 내린 은배로 돌려가며 술을 마실 수 있는 다섯 번째 술 잔을 나누는 순서가 되었다. 무동이 들어와 <광수무>를 추기 시작했 다. 반주 음악은 <여민락>이었다. 10인의 기로들은 순서에 따라 은배 에 술을 받아 마셨다. 잔치의 끝 무렵에는 다섯 방위를 상징하는 처용이 들어왔다. 동서남북과 중앙을 상징하는 오방처용이 각각 청색, 백 색, 적색, 흑색, 황색의 옷과 처용가 면을 쓰고 <처용무>를 추었다. 잔 치의 대미를 장식하는 파연악무(罷 宴樂舞)이다.
기로들의 2차
처용무도 끝나고 잔치를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기로신들은 숙종이 내 린 은배를 가지고 기로소에 가서 2 차 모임을 가지며 남은 기쁨을 다하 겠다고 왕에게 아뢰었다. 왕은 그들 을 위해 장악원의 음악을 하사하였다. 숙종은 기로연을 마친 후 숭덕 문을 지나 다시 대전으로 돌아갔고, 열 명의 기로신들은 기로소로 2차 를 하기 위해 각각 가마에 올랐다. 왕이 특별히 장악원의 음악을 하사 했으니 음악인들도 이동행렬에 함께 하였다. 음악감독인 전악은 악대 를 이끌고 흥겹게 연주를 하며 행렬의 흥을 돋우었다. 대금과 피리, 비 파와 해금, 장구와 북이 함께했다. 청색, 백색, 적색, 흑색, 황색의 오 방 처용과 무동도 행렬과 함께 움직였다. 그들이 이동하는 모습만으로 도 좋은 구경거리가 되었다.
기로신들과 음악인들이 기로소에 도착하였다. 지금의 광화문통이다. 기로소 주변에는 구경꾼들이 모여들었다. 한평생 조선을 위해 일한 국 가원로들을 볼 수 있는 자리였고, 조선 최고의 장악원 악인들이 연주 하는 곡을 들을 수 있으며, 무동들의 춤을 구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였기 때문이다. <기사사연도>의 그림을 보면 장악원 악대가 한참 곡 을 연주하고, 오방처용의 활기찬 동작이 이어지는 모습이 보인다. 그 런가 하면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이 흥을 이기지 못해 덩실덩실 춤동작 을 따라 하는 정겨운 모습도 보인다. 숙종이 기로들을 위해 내린 잔치 는 왕과 기로, 백성 모두에게 흥겨운 자리가 되었다             -출처: 한국문화재재단  글˚송지원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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