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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소년 무용수, 무동
15-07-07 17:13

무동의 탄생

무동(舞童)이란 조선의 국가 음악기관에 소속된 8세에서 15세 이하의 남자 아이로 조선왕실에서 행해지는 여러 의례에서 춤추는 역할을 담당한 신분이다. 나이로 보면 요즘의 초등학생 혹은 성장 속도가 늦은 중학교 초년생 정도에 해당한다. 이들은 노래를 주로 담당했던 가동(歌童)과 함께 남악(男樂)이라는 범주로 구분되어 여성 예술인인 여악(女樂)과 함께 조선왕실의 의례를 수행할 때 일정한 몫을 담당하였다. 조선의 궁중에서 나이 어린 무동이 필요했던 것은 왕실의 주요 의례를 연행할 때 수반되는 악무(樂舞)의 연행 전통 때문이다. 각종 의례를 위한 악무를 연행할 때, 기악 연주는 남성 음악인들인 악공(樂工)과 악생(樂生) 혹은 맹인 음악가인 관현맹인(管絃盲人) 등이 담당했지만 노래와 춤은 주로 여성 예술인들의 몫으로 주어졌던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조선의 지식인 가운데에는 남성들이 주로 참여하는 왕실 의례에서 여성 예술인들이 춤추는 행위에 대해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는 춤이 의례의 일부라는 점은 인정한다 하더라도 춤추는 여성 예술인들을 ‘풍기문란의 폐단을 일으킬 수 있는 잠재태’로 파악하는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며, 특히 성리학의 심화와 함께 이러한 인식은 더욱 깊어졌다. 결국 이런 시각은 궁중에서 활동하는 여악의 폐지론을 제기하는 데까지 이르렀고, 여성 무용수를 대신하여 춤을 담당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존재로 ‘곱상하게 생긴 남자 아이’가 물색되었다. 물론 남성의 성징이 아직 드러나지 않은, 사춘기 이전의 어린 남자 아이여야 했다. 이들은 여성이 할 수 있는 선이 고운 동작이 가능했고, 여성의 고운 목소리를 낼 수 있었으므로 일정 기간의 훈련을 거쳐 궁중의 각종 연향이나 외국 사신을 위한 연향 등에 동원되어 춤과 노래를 담당하게 되었다.


무동 제도 운영의 어려움

무동은 성장이 한참 이루어지는 나이에 선발되었기 때문에 재주를 모두 익혀 기예가 능숙해질 즈음이면 이내 다 자라 ‘동(童)’ 즉 ‘아이’가 아닌 ‘성인’이 되어 버리기 일쑤였다. 어린 아이로 멈추어 있는 동안에만 활용이 가능하다는 무동 집단의 특수성은 무동 제도 유지의 어려움으로 작용하였다. 늘 부족한 인원을 지속적으로 충당해야 하는 구조적 문제가 무동 제도 자체 안에 이미 내재되어 있었던 셈이다. 또 이들이 나이가 들어 더 이상 ‘무동’의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어려운 훈련과정을 거쳐 낸, 기교적으로 잘 숙련된 예술 인력의 활용방안 문제도 여전히 과제로 남게 되었다. 수년에 걸쳐 기예를 연마한 이들을 궁중의 여러 행사에서 활용하는 방안은 이들을 무동으로 탄생시키기 위해 강행하는 훈련 못지않게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여러 상황으로 조선의 전 시기를 통해 무동 제도는 ‘간헐적’으로 유지되었다. 이는 조선의 무동 제도가 안정적으로 운영되지는 못하였음을 알려준다. 무동 개인을 보면 이내 빠르게 성장해 버리는 아이들이었기 때문에 무동 신분 유지가 ‘한시적’ 혹은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 결국 다 자란 아이는 내보내고 지속적으로 새로운 무동을 물색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또 이들이 비록 아이이긴 하지만 ‘남자라는 성적 정체성’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대용’이라는 제도적 특수성으로 야기된 상황은 조선 지식인들에 의해 비판의 대상으로 떠오르곤 하였다.


무동의 존재에 대한 비판

무동의 존재는 그것이 ‘해괴한 풍습’이라는 이유 때문에 비판의 대상에 오르곤 했다. 19세기의 학자 다산 정약용 선생이 비판하는 이유를 보자. 예전에 과거 합격자를 발표하고 나면 합격자들을 위한 연향을 베풀었는데, 이때 무동이 동원되었다. 다산은 여기에 무동을 내리지 말라고 청하는 상소문을 왕에게 올렸다. ‘무동들에게 누런 저고리와 붉은 치마를 입혀 요사스럽고 괴이한 복장을 한 후, 유흥을 돕도록 하는 행위는 선왕들이 경계한 요기(妖器)와 요복(妖服)에 속한다’고 했다. 이는 사람을 현혹시키는 요사스러운 행위라는 것이다. 조정에서 국가를 위하여 어진 이를 써야 하는 마당에, 새롭게 과거에 합격하여 새로운 마음으로 임해야 하는 젊은이들에게 처음부터 방탕한 마음을 조장하는 것이니, 이는 어진 이를 대접하는 도리에 맞지 않다는 이유였다.

실속 없이 겉만 화려하고 음탕하며, 경망스러운 풍속이 곧 그런 데서 말미암아 조성된다고 다산은 파악하였다. 특히 남자를 여자로 변장시키는 것은 해괴한 일이며, 후세에 문명한 사람들이 이일을 본다면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 하였다. 이에 다산은 무동의 제도를 당장 없앨 수 없다면 궁여지책으로 그 의상만이라도 남자의 복장으로 바꿀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 무동들에게 여성의 옷을 입혀 무대에 올리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무동의 복식은 세종대에 이미 갖추어졌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여성의 옷으로 갈아입혀 춤을 추기도 했으니, 다산은 그와 같은 제도에 대해 비판을 한 것이었다.


무동의 조건과 존재의미

조선시대의 무동 제도는 이처럼 선발과 유지도 어려웠고, 무동의 존재에 대한 비판도 따랐지만, 그렇다 해서 아무나 무동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었다. 용모가 단정하고 깨끗해야 하며, 성품과 기질이 총명하고, 춤의 동작과 순서를 잘 외워서 왕 앞에서도 춤을 잘 출 수 있는 아이여야 했다. 그런 조건을 갖춘 아이를 전국 각 지역에 몇 명씩 고르게 할당하여 뽑도록 했다. 또 어린 아이가 이른 나이에 어버이의 품에서 떠나야 하고 친족과 멀어져야 했으므로 다른 이들과 일정 정도 차이를 두고 대우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전 시기를 통해 무동은 존립과 폐지를 반복하면서 일정한 숫자를 유지하지는 못하였다.

조선 사회에서 무동의 탄생은 여악, 즉 춤을 담당한 여성 예술인들의 존립 형태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여악이 가져올 수 있는 폐단을 예상하고, 그에 대한 대응 방안의 하나로 무동 제도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조선의 소년 무용수 ‘무동’은 국가음악기관인 장악원에 소속된 악인(樂人)의 일원으로서 조선의 각종 의례에 동원되어 악무를 담당했지만, 이들이 ‘성장하는 과정에 있는 아이’라는 신체적 조건으로 인해 제도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의 음악인 집단으로 존속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조선의 무동은 조선 말기까지 존속하여 장악원 소속의 음악인 신분으로 왕실의례에 참여하여 일정 부분을 담당하였으므로 이들의 음악사적 의미는 결코 작지 않았던 것으로 평가된다.

무동의 모습
      -출처: 한국문화재재단  글 송지원(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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