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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과 휴전 전쟁 그 후, 임진각
15-07-08 14:05

 
한국전쟁과 휴전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남침으로 낙동강까지 후퇴했던 한국군은 같은 해 9월 28일 UN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을 탈환하고 10월 20일 평양을 점령하면서 통일을 눈앞에 두는 듯했으나 11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후퇴했다.
UN은 전쟁이 국제전으로 확대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휴전을 결의하고, 1951년 6월 30일 공산군 측에 휴전회담을 제의했다. 이후 같은 해 7월 개성에서 첫 회담이 시작되고, 10월에는 회담 장소를 판문점으로 옮겨 진행했으나 전쟁 포로 처리 문제를 두고 9개월간 중단되기도 했다. UN군 측은 포로들의 자유의사에 의한 송환원칙을 제안했으나 공산군 측은 이를 거부하면서 1953년 7월 13~14일 전 전선에서 걸쳐 총공세를 감행,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양측은 7월 27일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에 조인하고 휴전협정 이행 감시를 위한 ‘군사정전위원회’를 구성, 본부를 판문점에 두었다. 또 스위스·스웨덴·체코슬로바키아·폴란드로 구성된 중립국감시위원단을 설치해 휴전협정 조항의 준수·관찰·감시·조사를 할 수 있게 했다.

휴전협정에 따라 1953년 8월 5일부터 9월 6일 사이에 우선 송환 희망자 9만 5,000여 명이 판문점에서 송환되고, 송환 거부 포로 2만 2,000여 명은 중립국 송환위원회에 넘겨져 자유의사에 따라 행선지를 결정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한미방위조약 체결 전에는 휴전할 수 없고, 반공 애국 동포를 북한으로 보낼 수 없다”며 6월 18일 0시에 영천, 대구, 논산, 마산, 부산, 거제도 등 7개의 포로수용소에 있던 반공 포로 3만 7,000여 명을 한꺼번에 석방해버렸다.

북한의 끊임없는 도발… 남침용 땅굴 발견
북한은 1971년 9월 25일 김일성의 명령에 따라 땅굴작전을 개시했다. 이른바 ‘9·25교시’라 일컬어지는 명령에서 김일성은 “남조선을 해방하기 위한 속전속결 전법을 도입하여 기습전을 감행할 수 있게 하라”고 지시했다. 북한은 이에 따라 각 군단 별로 땅굴작전을 수행했으며, 현재까지 약 20여 개의 땅굴이 굴착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북한의 남침용 땅굴은 1974년 11월 15일 경기도 연천군 고랑포(제1 땅굴)에 서 처음으로 발견된 후 1975년 3월 19일 철원(제2 땅굴)에서, 1978년 10월 17일 파주 판문점(제3 땅굴) 부근에서 차례로 발견됐다. 1990년 3월 3일 강원도 양구 북방에서 네 번째 땅굴이 발견되면서 전체 휴전선에 땅굴이 존재한다는 것이 확인됐다.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미군 장교 2명 살해, 9명 중경상
북한군은 1976년 8월 18일 오전 10시경 ‘돌아오지 않는 다리’ 남쪽 UN군 측 제3초소 부근에서 미루나무 가지치기를 하는 한국인 노무자 5명의 작업을 지휘·경호하던 미군 장교 2명과 사병 4명, 한국군 장교 1명과 사병 4명 등 11명을 무차별 공격했다.
북한의 장교 2명과 수십 명의 사병은 미군과 한국 측 경비병에게 작업중지를 요구하며 도끼와 몽둥이 등을 휘둘러 미군 경비중대장 아서 보니파스(Arthur Bonifas) 대위, 소대장 마크 배럿(Mark Barret) 중위 등 미군 장교 2명을 살해하고 나머지 9명에게는 중경상을 입혔다.
사건 직후 주한 미군과 한국군은 ‘데프콘 3호(경계상태 돌입)’를 발령하고, F-4 전폭기 1개 대대와 F-111 전폭기 1개 대대를 한국에 증파하는 한편 항공모함 미드웨이호와 B-52 폭격기를 출동시키는 등 한반도는 전쟁위기에 직면했다. 그러나 북한의 김일성이 유감의 뜻을 표명하는 사과문을 미군 측에 전달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이 사건 이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이 남과 북의 분할경비로 바뀌어져 군사정전위 회의장 건물들을 반분하는 선상에 시멘트 포장의 경계표지가 만들어졌다. 이를 중심으로 각기 상대편 지역에 있던 초소들도 철거됐다. 미군은 사건 10주년인 1986년 8월 18일 판문점 근처에 있는 캠프 키티호크(Camp Kitty Hawk)를 이 사건으로 사망한 보니파스 대위를 기려 캠프 보니파스(Camp Bonifas)로 명명했다.

DMZ 내 도라산 전망대

화해 그리고 협력… 정주영 회장,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방북
1998년 두 차례에 걸쳐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소떼 1,001마리를 끌고판문점을 넘어 북한을 방문했다. 이 일은 분단의 아픔으로 신음하고 있는 대한민국과 우리 국민에게 남북교류의 물꼬를 트게 해줄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던져줬다.
김대중 대통령이 2000년 6월 13일 분단 55년 만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는 장면은 생생한 한 편의 드라마였다. 특히 남북 두 정상의 만남은 반세기 분단을 넘어 화해의 길을 여는 민족사적인 대사건이었다.
서울공항을 출발한 대통령 전용기는 67분 만에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 김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은 뜨겁게 악수를 나누었다. 양 정상은 6·15공동선언을 발표했다.
2000년 6·15공동선언 이후 남북교류협력의 하나로 2000년 8월 9일 ‘개성공업지구건설운영에 관한 합의서’가 체결되고 2002년 11월 27일 개성공업지구법이 공포되면서 개성공단이 구체화됐다. 2004년 6월 시범단지에 18개 업체가 입주해 12월 생산제품이 처음으로 반출됐다. 2010년 9월에는 입주기업 생산액이 10억 달러를 돌파하고, 북측 근로자가 5만 명을 넘었다. 2014년 남북교역량은 23억 4,300만 달러로 역대 최고 수준을 기록했는데, 99%가 개성공단 몫이었다. 그러나 북한은 이명박 정부의 5・24 조치에 맞서 개성공단 폐쇄로 맞섰다. 이렇듯 개성공단은 남북 경제협력의 장이기도 하지만 남북 대화의 돌파구란 점에서도 중요하다. 특히 최근처럼 남북관계가 경색국면에 접어들 때 개성공단의 존재는 한층 더 중요해진다.
2007년 10월 2일 노무현 대통령은 오전 9시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걸어서 군사분계선을 통과했다. 노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은 남북공동번영, 한반도 평화, 화해와 통일 등 3대 분야의 의제를 놓고 의견을 교환했다.

보수·진보단체 간 첨예한 대립… 대북전단 살포 찬·반 논란 가열
임진각은 한국전쟁의 중심지였고, 현재는 군사접경지역이다. 통일이 된다면 남북을 잇는 통로가 되겠지만, 지금은 이념 갈등으로 시시때때로 소란스럽다.
탈북자단체 등 보수진영은 “북한 주민에게 북의 실상을 제대로 전달해야 한다”며 대북전단 살포를 강행하고 있고, 진보단체와 주민들은 “남한 주민의 안전에 이득될 게 없다”고 맞서면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데, 북한도 대북전단이 뿌려질 경우 무력대응에 나설 것이라고 위협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해결이 간단치 않다.

중국·북한군 유해 1,056구 안장된 적군묘지… 중국군 유해 본국 송환
파주 임진각 주변의 적성면 답곡리에는 적군묘지(5,204㎡)가 있다. 6·25전쟁 중 남한지역에서 숨진 북한군과 중국군의 유해를 모아 1996년 정부가 조성한 곳이다. 조성 당시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기 측 지역에서 발견된 적군 시체에 대해 인도·인수 조치를 취한다’는 제네바협정 이행과 인도주의 차원에서 이뤄진 일이다. 적군묘지는 1·2 묘역으로 나눠 북한군 709구와 중국군 425구를 비롯해 수해 때 북한에서 임진강으로 떠내려온 북한 주민 유해 등이 묻혀 있다. 정부와 군(軍)은 중국 방문객들의 발길이 이어지며 종합적인 관리가 요구되자 2012년 5억 원을 들여 사실상 방치되다시피 했던 적군묘지를 재단장했다. 이후 박근혜 대통령이 2013년 6월 방중 시 류엔둥 중국 부총리에게 중국군 유해 송환을 먼저 제안했고, 양국이 5개월여간 실무협상 끝에 2014년 3월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적군묘지에 묻혀 있던 중국군 유해 437구를 중국 측에 송환했다. 한국은 최근 추가 발굴된 중국군 유해 68구를 2015년 3월 20일 중국 측에 보냈다.
 
- 출처: 한국문화재재단  글. 이종태 (경인일보 지역사회부 부장) 사진. 파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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