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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이 빚어낸 성찬 입 안이 호사롭구나 조선왕조궁중음식 정 길 자 인간문화재
14-12-21 11:23

잘 먹고 잘사는 사람을 일러 ‘오복(五福)을 타고났다’며 부러워한다. 오복은 ①수(壽·오래 사는 것) ②부(富·부자) ③강녕(康寧·건강하고 마음이 편안함) ④유호덕(攸好德·도덕 지키기를 낙으로 삼는 일) ⑤고종명(考終命·제 명대로 살다가 편안하게 죽음)인데 이 중에서도 으뜸은 오래 사는 것이다. 오래 살려면 잘 먹고 마음이 편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최고 전통음식은 삼국시대부터 고려를 거쳐 조선왕조에 와 꽃을 피운 궁중음식이다. 군주시대 지존으로 군림하며 천하를 호령했던 왕과 왕비는 무얼 먹고 살았을까. 음식문화가 현대인의 화두로 떠오른 요즘 음식한류의 중심에 선 고급요리가 바로 조선왕조궁중음식(이하 궁중음식)이다.

 일제의 국권침탈로 자칫 멸실될 뻔했던 궁중음식 조리법은 덕수궁 주방나인으로 입궁(1901)해 경복궁·창덕궁 주방에서 평생 봉직한 한희순(1889~1972) 상궁이 있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됐다. 국가에서는 한 상궁을 초대 인간문화재로 지정(1970. 12. 30)했고, 그의 제자인 황혜성(1920~2006) 교수가 2대 인간문화재로 지정(1973. 11. 11)돼 뒤를 이었다.

 한양대 가정과에서 후진을 양성한 황 교수의 제자사랑은 남달랐다. 단일종목이었던 궁중음식을 양분해 제자(정길자·68·궁중병과연구원장)에겐 떡·병과를, 딸(한복려·68·궁중음식연구원장)에게는 궁중음식을 맡겨 3대 인간문화재로 동시에 지정(2007. 9. 14)되게 했다. 70년대 한국 사회를 감동시켰던 황혜성·정길자의 사제간 사랑이다.

 “가정과에 입학 후 얼마 안 돼 황 교수님이 부르시더니 대뜸 ‘너 복려 아니?’ 하시는 거예요. 서울 수도여고 동창으로 둘도 없는 단짝친구라고 했더니 ‘딸을 하나 더 얻은 것 같다’며 기뻐하셨어요. 이후 선생님을 어머니와 진배없이 믿고 따르며 열성으로 배웠습니다.”

 서울 용산에서 태어난 정길자(鄭吉子) 원장은 조리예술과 음식예절 속에 일생을 살며 자신의 인품도 이에 부응되게 살아왔는지 늘 되돌아본다고 했다. 예부터 나라를 대표하는 음식문화에 따라 국가의 품격이 달라지곤 했다면서 최근의 무절제한 식습관을 과감히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봉건시대는 계층 간 인간 차별이 심해 신분에 따라 식사용어도 달랐다. 임금은 수라를 젓수다, 사대부는 진지를 자시다, 서민은 밥을 먹다, 천민은 끼니를 때운다고 했다. 반찬 가짓수도 제한돼 임금과 왕비만이 12첩 반상을 받을 수 있었고 사대부는 9가지, 양반은 7가지만 허용됐다. 궁중에선 된장찌개를 토장조치, 깍두기를 송송이라 불러 차별화시켰고 임금의 점심은 낮것상이라 했다.

 “조선시대 왕실주방에선 제일 좋은 음식만을 요리해 냈습니다. 전국에서 진상된 최고 품질의 재료를 수십 년 경력의 전문요리사가 지성으로 만들었으니까요. 그 전통을 이은 궁중음식이 한국을 찾은 각국 정상의 입맛을 사로잡아 음식외교에도 큰 몫을 하고 있습니다.”

 정 원장이 세계를 순회하며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궁중병과(餠菓)를 선보였을 때 일이다. 한입에 쏙 들어가는 떡과 과자를 조청에 찍어 먹으면서 현지 고위급 정계인사와 문화계 명사들은 크게 감동했다. 아시아·미국·유럽에서도 정 원장이 빚은 떡과 과자는 음식예술품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고, 궁중음식을 통한 그의 국위선양은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왕조시대 임금은 초조(初朝)반상, 아침수라상, 낮것상, 저녁수라상이란 이름으로 하루 네 차례의 음식상을 받았다. 아침 7시 이전의 초조반상에는 죽과 마른반찬이, 오전 10시의 아침수라상은 흰쌀밥·팥밥에 육류·채소·해산물의 12가지 반찬이, 오후 1시의 낮것상에는 국수나 미음에 떡·과자가, 오후 7시의 저녁수라상에는 12첩 반상이 다시 올랐다. 이 밖에도 구이·포·찜·화채·부침 등의 종류만 수십 가지가 넘었으며 이런 식생활 양식은 경국대전, 진연의궤, 궁중음식발기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외소주방과 내소주방으로 구분된 왕실주방은 신분이 확실한 13세 소녀를 입궁시켜 엄격히 교육했고 20년이 지나서야 주방 상궁으로 승격시켰다. 임금이 식사하기 전 독이 든 것이나 상한 음식을 가려내기 위해 먼저 맛을 보는 상궁을 기미상궁이라 했다. ‘사전에 기미를 알아차린다’는 말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중전이 대궐로 입궁할 때 친정에서 부리던 몸종을 데려와 기미상궁에 앉히기도 했다.

 “궁중에서는 잔치가 끊이지 않았어요. 왕족들의 환갑·고희·팔순 때나 세자 가례의 잔칫상에는 떡과 과자를 높이 괴는 고배(高排)와 상화(床花)가 화려한 장식으로 진설됐습니다. 이때마다 궁중병과가 궁중잔치의 꽃이었지요.”

 잔치가 끝나면 고배와 상화는 헐지 않고 가자(架子)에 실어 종친이나 당상관의 집으로 보내졌다. 이 음식을 민간에서 모방해 혼인이나 환갑잔치 때 떡과 오색과자를 괴는 고배풍습이 유래된 것이다. 오늘날과 같이 식생활 문화에 큰 변혁을 겪는 때일수록 우리 전통음식의 우수성을 유지시켜 세계의 음식문화에 대응해야 한다고 정 원장은 강조한다.

 식품영양학자들이 분석한 각종 영양소와 열량 분석에 따르면 조선왕조궁중음식은 현재의 어떤 웰빙음식보다 균형성이 뛰어나다는 통계다. 세계는 지금 커피음료에서 값비싼 고급요리까지 내세워 각국 음식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정 원장은 여러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복잡하게 인식되던 한식의 조리과정도 대폭 간소화시켰다. 박영미·조은희·이종민 이수자가 후계 맥을 이으며 궁중음식의 세계화에 일조하고 있다. “궁중음식은 드시는 분을 임금님으로 모신다는 정성이 앞서야 한다”고 정 원장은 말했다.                                                                              

                                                          이규원 시인·‘조선왕릉실록’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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