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루에 물을 붓고 갈아서 그리거나 글씨를 쓰는 데 쓰는 서화 용구(書畵用具)로 검은색의 고형체로서 벼루에 갈아서 사용하는 것으로 문방사우(文房四友)의 하나이다. 먹을 제작한 시초는 분명하지 않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후한(後漢)의 서도가인 위탄(韋誕)이 발명했다고 한다. 그 이전에는 죽목(竹木)의 첨필(尖筆)에 흑칠을 해서 간독(簡牘 : 대쪽과 얇은 나무쪽)에 썼다고 학자들은 생각하고 있다.그러나 위탄이 태어나기 이전의 문헌인 『후한서』의 등황후전(鄧皇后傳)과 후한의 명제(明帝)가 창수(創修: 만들고 고치다)한 『동관한기(東觀漢記)』에 2세기 초인 화제(和帝) 때 각국에서 한나라에 먹을 헌납했다는 기록이 있다.또 나라에 대사가 있을 때면 황제는 황태자나 고관·학자에게 먹을 하사하여 은총을 표시했다고 한다. 즉, 먹은 전국시대에 있어서도 서사용(敍賜用)으로 사용되었던 것 같다.“춘추(春秋) 제(齊)의 오패(五覇)의 한 사람인 환공(桓公)은 정치 개혁을 위해서 소리(小吏)에 명하여 그의 명령을 필묵을 사용하여 목독(木牘: 나무 조각)에 적었다”는 기록이 『관자(管子)』에 보인다.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서도 은대(殷代)의 갑골 문자는 먹[墨]이나 적(赤)의 액체를 사용해서 썼다는 것이 실증되고 있다.
그리고 진(晋)나라 무제(武帝) 때에는 먹으로 죽간(竹簡)에 썼으며, 주(周)나라 난왕시대(?王時代)에 『죽서기년(竹書紀年)』이라는 책이 묵사(墨寫: 먹으로 적다)되었다는 것이 논증되었다. 잠확유서(潛確類書)에 의하면, “고대에는 칠유(漆油)로 쓰다가 뒤에 모두 석묵(石墨)을 쓰게 되었으며, 한(漢)나라 이후에 와서 송연(松煙)과 동매가 성행하면서부터 석묵은 사라졌다”고 한다. 송유는 유연을 뽑는 것으로는 가장 많이 사용되어 왔다. 오늘날에도 제묵의 최량의 재료로 되어 있다.
송연을 재료로 해서 만든 먹을 송연묵이라 한다. 이 송연묵이 2세기 이전에 이미 사용되었다는 것은 위(魏)나라 무제(武帝)의 셋째 아들인 조식(曹植)의 <악부시 樂府詩)>에 “먹은 송(松)의 매연으로 만든다”라는 것으로도 증명이 된다.
이 송연묵은 안후이성산(安徽省産)이 가장 유명했다. 명나라 도종의(陶宗儀)의 『철경록(輟耕錄)』에 의하면, “당나라 때 고구려에서 송연묵을 세공으로 많이 바쳤다”고 하였다.
먹의 특징
문방구의 일종. 소나무(송진), 기타 식물의 기름을 연소시켜 생긴 그을음을 아교로 굳혀 만든 것으로 벼루에 갈아서 탄소의 로이드 용액의 먹물을 만든다. 원료와 콜로이드 입자의 성질에 의해 발색(發色)이 미묘하게 변한다. 예로부터 중국에서 먹은 서화의 중요한 자료로 발달하여 서예술과 수묵화의 발전을 도모했다. 은나라 때의 갑골문자를 묵서한 것이 있음. 옛날에는 그을음 또는 돌먹(石墨)을 사용하여 연한 묵환(墨丸)을 만들어 이것을 원형의 벼루 위에서 숫돌로 갈아 썼다. 후베이성 운몽수호지(雲夢睡虎地)의 진묘(秦墓)와 동성(同省) 강릉 봉황산의 전한묘에서는 돌 벼루, 숫돌, 먹이 출토했으며, 허베이성 망도의 후한묘 벽화에는 둥근 벼루 위에 방추형(方錐形)의 숫돌을 올려놓은 그림이 있다. 후에 고형먹(固形墨)이 생겨 육조~당대에 제묵(製墨) 기술이 발달해서, 오대십국의 남당에서는 이정규 먹이 생산됨. 오대 이후, 송연묵(松煙墨)이 유연묵(油煙墨)으로 변해 많이 사용되었다고 하며 송의 번곡(藩谷), 원의 주만초(朱萬初) 등 묵공(墨工)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유연묵이 성행했던 것은 명대 이후로, 가정년간(1522~66)의 나소화(羅小華)나 왕중산(汪中山), 만력년간(1573-1620)의 방우로(方于魯) 정군방(程君房) 등의 유명한 제묵가가 출현. 청대에는 조소공(曹素功), 왕근성(汪近聖), 호개문(胡開文)등이 알려지고, 안후이성에서 제묵업이 번창했으므로 휘묵(⇒휘묵호필)이라는 명칭이 있음. 명묵 ? 청묵은 저명한 서화가의 문자나 의장을 파서 옻칠로 마무리짓고 있다. 제묵법의 저서에 심계손(沈繼孫)의 『묵법집요』가 있고, 명묵의 도록에는 방우로의 『방씨묵보』, 정군방의 『정씨묵원』, 방서생의 『묵해』가 있다.
경묵(京墨) / 먹
라틴명: Atramentum
약재의: 효능 사심혈(瀉心血) (심혈(心血)을 내리는 것임.)
청폐(淸肺): (열기에 의해 손상된 폐기를 맑게 식히는 효능임)
평간(平肝): (간기(肝氣)가 몰리거나 치밀어 오르거나 간양(肝陽)이 왕성(旺盛)할 때 간기를 화평(和平)하게 해주는 방법임)
소종(消腫): (옹저(癰疽)나 상처가 부은 것을 가라앉히는 치료법임)
생기(生肌): (기육(肌肉)이 생기게 하는 효능임)
양혈(凉血): (청열법(淸熱法)의 일종으로서, 혈분(血分)의 열사(熱邪)를 제거하는 치법.)
지혈(止血): (출혈(出血)을 그치게 하는 효능임)
청심경혈열(淸心經血熱): (심경(心經)에 열사가 침입하여 혈열이 생긴 것을 제거하는 효능임)
작용부위: 간(肝) , 심(心)
성미: 신(辛) , 온(溫) , 평(平)
주의사항: 오래된 것이 약효가 좋음.
약재사용처방
묵부환(墨附丸) / 무사(無嗣) , 월경부조(月經不調)
제음단(濟陰丹) / 무사(無嗣)
차비거홍방(搽鼻去紅方) / 비사(鼻齄)
태평환(太平丸) / 폐위(肺痿) , 허로(虛勞)
투빙단(透氷丹) / 중풍열증(中風熱證) , 탄탄(癱瘓) , 중풍(中風)
경향묵(京香墨) / 먹
라틴명: Atramentum
약재의 효능
청심(淸心): (열사(熱邪)가 심포(心包)에 침입한 것을 치료하는 방법.)
양혈(凉血): (청열법(淸熱法)의 일종으로서, 혈분(血分)의 열사(熱邪)를 제거하는 치법.)
지혈(止血): (출혈(出血)을 그치게 하는 효능임)
청심경혈열(淸心經血熱): (심경(心經)에 열사가 침입하여 혈열이 생긴 것을 제거하는 효능임)
작용부위: 심(心)
주의사항: 오래된 것이 좋음.
약재사용처방: 조약방(照藥方) / 양매창(楊梅瘡)
묵(墨) / 먹
라틴명: Atramentum
약재의 효능: 청심(淸心) (열사(熱邪)가 심포(心包)에 침입한 것을 치료하는 방법.)
양혈(凉血): (청열법(淸熱法)의 일종으로서, 혈분(血分)의 열사(熱邪)를 제거하는 치법.)
지혈(止血): (출혈(出血)을 그치게 하는 효능임)
청심경혈열(淸心經血熱): (심경(心經)에 열사가 침입하여 혈열이 생긴 것을 제거하는 효능임)
작용부위: 심(心)
주의사항: 오래될수록 약효가 좋음.
약재사용처방
소아초생구급방(小兒初生救急方)[4] / 마아(馬牙)
일립금단(一粒金丹)[2] / 일체풍(一切風)
초묵법(醋墨法) / 산후혈훈(産後血暈)
진상품관련근거
먹은 경상도 (합천군) 충청도(단양군, 청풍군) 에서 진상하였다는기록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있다.
먹의 제조 방법
용기에 기름을 가득 넣고 심(芯)에 점화시켜 태워서 생긴 매연을 긁어모아 고무질 혹은 교질(膠質)을 혼합하여 호장(糊狀)으로 만든 다음 조그만 틀에 부어 굳힌다.
이와 같이 고대에는 그을음[煤]에다 기름을 개어서 만든 일종의 유연묵(油煙墨)을 가지고 인쇄를 하였던 것 같다. 그을음은 불을 사용하여 자연적으로 되는 것이므로 그을음을 사용하여 먹을 만든 것은 예로부터 행해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유연묵의 제조법은 불을 잘 조절해서 유연을 채취하여 만드는 것인데 송유(松油)·동유(桐油)·석유(石油) 또는 칠(漆) 등이 사용되었다. 이 중 동유의 사용은 훨씬 뒤의 일이다
동유를 태워서 그 탄소분(炭素粉)으로 제조한 먹을 ‘동화묵(桐花墨)’ 또는 ‘동매(桐煤)’라고 한다. 이 동매는 질이 견고하고 광택이 난다.
먹의 기원과 유래
우리 나라에서는 언제부터 먹을 사용하였는가를 문헌에 의하여 보면, 고구려시대에 송연묵을 당나라에 세공으로 바쳤다는 기록이 『철경록』에 나타난다. 이로써 삼국시대에 벌써 먹이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고구려 고분 중 「모두루묘지(牟頭婁墓誌)」가 발견된 경내의 전실(前室) 정면 상벽(上壁)에는 가로세로로 그어진 계선(界線)에 매항 10자 총 81항의 사경체(寫經體) 묵서가 있다.
아교[膠]도 제묵의 중요한 성분이다. 이 아교는 보통 사슴의 뿔이나 우피(牛皮)·어피(魚皮) 등에서 정제된다. 이들 원료를 물에 적셔 부드럽게 한 뒤, 삶아서 사(紗)나 목면의 포(布)에 씻어 맑은 액체를 만든다. 아교와 그을음의 배합은 제묵법의 비밀로 되어 있었다.
제묵의 개량법으로는 먹의 농도를 짙게 하기 위해 다시 짙은 홍색 광택이 있는 단사류(丹砂類)를 가공시키기도 하였다. 그리고 먹의 방부(防腐)와 묵색의 보존을 위해서는 침(?: 목서과에 속하는 낙엽교목)의 나무껍질이나 석류의 껍질, 담반(膽礬: 빛이 푸른 황산동) 등을 사용하였다.
그밖에 아교의 취기(臭氣: 좋지 못한 냄새)를 없애기 위해서 사향(麝香)이나 장뇌(樟腦)를 증류하여 얻은 방향(芳香: 꽃다운 향기)이 있는 백색 결정체의 향료 또는 박하 등의 향료를 가미하기도 하였다.
한대(漢代) 이전의 먹의 형태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 수 없다. 한대 이후의 먹은 환형(丸形)이나 편평(扁平)한 형태로서 원주형(圓柱形)·방주형(方柱形)이었다. 뒤에 와서 여러 가지 모양의 것이 나타났다. 미적 취향에서 그림이나 문자를 장식하기도 했고 금분(金粉)이나 회구(繪具)로 채색하기도 하였다.
『묵사(墨史)』 고려조에 의하면, 관서 지방의 맹주(猛州)·순주(順州)·평로성(平虜城)에서 생산되었던 먹이 주로 중국에 수출되었는데, 그중 맹주묵이 가장 좋았고 순주묵이 그 다음으로 손꼽혔음을 알 수 있다. 신라에서도 비교적 정품(精品)의 먹이 생산되었다. 양가(楊家)·무가(武家)의 먹은 모두 송연묵으로서 그 품질이 매우 좋았으며 현재 일본의 쇼소원(正倉院)에 남아 전한다.
고려묵(高麗墨)은 묵광이 번쩍이고 묵향이 코를 쏘는데, 이는 송연을 취재하여 정제한 때문인 듯하다. 조선 정조 때의 대제학 서명응(徐命膺)의 『고사신서(攷事新書)』에는 조림매묵법(造林煤墨法)이 자세히 적혀 있다. “송연 열 근과 아교 네 근, 물 열 근을 배합하여 먹을 만든다. 구체적으로는 물 아홉 근에 아교를 담가 동분(銅盆)에 넣어 녹인 다음 연(煙)이 섞일 때까지 나머지 한 근의 물로써 씻어 별기(別器)에 담아 물을 뿌리면서 수없이 찧어 만들어낸다”는 내용이다.
우리 나라에 있어서 송연묵(숫먹·개먹)으로는 양덕(陽德)의 산품이 유명하고, 유연묵(참먹)은 해주의 것이 유명했다. 그리고 한림풍월(翰林風月)을 비롯하여 초룡주장(草龍珠張)·부용당(芙蓉堂)·수양매월(首陽梅月) 등이 상품(上品)이었다. 대개 목판 인쇄에는 송연묵을 썼으며, 금속 활자 인쇄와 서예에는 주로 유연묵을 사용하였다.
먹[墨]의 시초는 중국의 한대(漢代) 초라는 정설이 있다. 붓은 진대(秦代)의 몽염(蒙恬)이, 종이는 한대의 채륜(蔡倫)이 발명하였다고 하나, 먹의 발명자에 대한 기록이 없다. 다만 붓을 쓰기 시작한 때와 거의 같은 시기에 발명되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먹이 발명되기 이전에는 문자를 골편(骨片)이나 금석(金石)에 새겼다. 이를 갑골시대(甲骨時代)·금석시대라 한다. 그 후 인지(人智)와 문화가 발달함에 따라 문자의 사용범위가 넓어지고, 갑골문이나 금석문만으로는 기록하기가 어려워지자 대나무 조각이나 나뭇조각 또는 천 등에 문자를 쓰게 되었다. 이때를 죽간시대(竹簡時代)라 한다. 당시 죽간에 쓰던 것은 붓이 아닌 죽정(竹挺)이란 것으로 옻[漆]을 묻혀 썼다. 그래서 그 문자의 획이 마치 올챙이 모양과 같다 하여 죽첩과두문자(竹牒蝌蚪文字)라고 하였다. 공자나 맹자가 쓴 글씨도 모두 이 죽간칠서(竹簡漆書)였다.
견백(絹帛)이란 천(명주)은 종이보다 다소 먼저 발명되었다. 죽간시대에 이미 명주에 글씨를 썼으며, 이 글씨는 붉은 단서(丹書:붉은 광석이나 돌가루를 반죽하여 그것을 붓에 묻혀 쓴 글씨) 아니면 검은 묵서(墨書)였다. 이때 묵서의 원료는 자연산 석날(石靭)이라는 일종의 광물이었다. 석날이란 오늘날 연필심으로 쓰이는 흑연(黑鉛)의 일종인 듯하며, 거기에 옻을 섞어서 썼던 모양이다. 그 후 문화가 발달됨에 따라 점차 그을음, 즉 연매(煙煤)를 옻 대신 썼다. 이어서 아교풀과 섞어 쓰게 되면서 드디어 제묵(製墨)의 단계로 옮겨지게 되었다. 전한(前漢)시대에도 오늘날과 같은 먹은 만들지 못한 듯, 당시에 쓰였던 얇고 편편한 벼루와 마묵구(磨墨具)가 낙랑채협총(樂浪彩瑩塚), 그 밖의 한대(漢代) 고분에서 출토되었다. 25∼220년 후한(後漢)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오늘과 같은 먹을 만들게 되었는데, 그것은 종이의 발명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처음에는 송연묵(松煙墨)을 생산하였고, 유연묵(油煙墨)을 사용하게 된 것은 오대십국(五代十國)시대에 이르러서다. 당시 남당(南唐)의 후주(後主)가 먹의 사용을 장려하여 이정규(李廷珪)와 같은 유명한 묵공(墨工)이 나왔고, 그 후 송(宋)·원(元)·명(明)·청(淸) 등으로 이어져 오면서 많은 묵공이 배출되고 일품(逸品)이 생산되었다.
한국의 제묵 연혁을 살펴보면, 고대부터 먹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위만·낙랑시대에 중국의 것을 본받은 것이 사실인 듯하며, 신라시대에 들어와서 비로소 정품(精品)의 먹이 생산되었다. 신라의 양가(楊家)·무가(武家)의 먹은 모두 송연묵으로서 그 품격(品格)이나 질이 매우 좋았다.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는 조선묵(朝鮮墨)의 황금시대를 이루었다. 일본에서도 먹은 매우 귀하게 여겼으며, 그들이 먹을 처음으로 만든 것은 고구려의 담징(曇徵)이 제지법과 제묵법을 610년에 전해준 데서 비롯되었다. 일본인 자신들도 이 사실을 시인하고 있으며, 이 밖에도 신라의 먹을 수입하여 매우 소중히 여겼다 한다.
제묵법
먹을 만드는 방법은 송연묵과 유연묵에 따라 각각 다르다. 그을음[煙煤]을 흙처럼 고정한 것이 먹이다. 그런데 연매를 취하는 방법에는 소나무를 태운 송연(松煙)에서 취하는 것과, 채종유(菜種油)·참기름[胡麻油]·비자기름[榧油]·오동기름[桐油] 등을 태운 연기에서 취하는 것이 있다.
이 그을음이 바로 먹의 주재(主材)가 된다. 실내에 아궁이나 가마[窯] 등을 마련해 놓고 재료를 태우면, 그을음이 그 굴뚝에 붙게 된다. 그것이 위쪽으로 모이는 것일수록 상제(上劑)라 하여 품질이 좋다. 당묵(唐墨)의 머리 윗면에 정연(頂煙) 또는 초정연(超頂煙)이라고 표시해 놓은 것은 연매가 상품 양질이라는 뜻이며, 특히 공연(貢煙)이라 표시한 것은 최상품이라는 뜻이다.
그을음의 질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반죽하여 굳히는 아교풀의 질과 성능도 매우 중요하다. 그을음을 아주 가는 체로 쳐서 아교풀로 개어 반죽한 다음, 절구에 넣어 충분히 다진다. 묵명(墨銘)에 십만저(十萬杵) 또는 목구철저삼만(木臼鐵杵三萬)이라고 쓰인 것은 그 숫자만큼 찧어다졌다는 뜻이다. 그것을 목형(木型)에 넣고 압착한 다음, 꺼내어 재 속에 묻어 차차 수분을 빼며 말린 것이 먹이다. 그러나 요즘에는 광물성 그을음 또는 카본 등을 재료로 다량 생산하므로 정품(精品)이 드물다.
참고문헌
두산백과, 미술대사전(용어편)1998, 한국사전연구사, 고사신서(攷事新書)(서명응), 철경록(輟耕錄)(도종의), 묵사(墨史)(陸友),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신증동국여지승람, 한국전통지식포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