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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도 진상물, 제주도 진상품
 

한자; 進上物
영어음역; jinsangmul
영어의미역; present to the king
이칭/별칭; 진상품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시대; 조선/조선전기,조선/조선 중기,조선후기,조선/조선 말기
집필자; 김동전 

 
[정의]
조선시대 제주 지역의 지방관이 왕에게 의례적으로 바친 특산물.


[개설]
진상은 원래부터 납세의 의무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각 도(道) 단위로 지방관이 한 달에 한 번씩 상납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각 주·현에 그 부담이 배정되었고, 이것이 다시 각 민호에 배정되었다. 조선 시대 제주의 진상물 품목으로는 말·귤·전복·버섯·한약재 등을 들 수 있다.


[관련 기록]
『탐라지』(제주목 공헌조)에는 ‘영진상(營進上)’이라 하여 제주영에서의 진상과 목공물(牧貢物)을, 제주목에서의 공물과 구분하여 그 품목을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영·목 체제에 따라 군사 차원의 제주영과 행정 차원의 제주목을 구분해 진상한 것으로 보인다. 제주영에서 담당한 진상 항목은 도계(到界)·월령(月令)·산물(産物)·세초(歲抄)·체임(遞任)·삼명일(三名日)·연례마(年例馬)·세공마(歲貢馬) 등이었다.

진상으로는 먼저 도계진상과 체임진상을 들 수 있다. 『탐라지』의 영진상도계(營進上到界)의 ‘영(營)’은 제주영이므로 군사직의 병마수군절제사가 부임하였다. 조선 초기부터 왕명으로 지방에 사신으로 나가는 자와 지방 관리로 임명된 자는 그 신분의 높고 낮음에 불구하고 임지에 도착한 날과 각 명일에는 각각 예장(禮狀)과 공장(公狀)을 올리는 것이 통례였다.

그 때 사은의 예물로서 봉진하는 것이 도계진상이며 백랍(白蠟) 24편을 바쳤다. 체임 때에도 같은 사은의 뜻으로 토산물을 봉진하였다. 즉, 체임 때에는 말과 마장(馬裝)·중소녹비·백랍·녹장포(鹿長脯)·녹쾌포(鹿快脯)·녹미(鹿尾)·녹설(鹿舌)·산호 등을 봉진하였다.

그러나 이후 『탐라지』의 말·마장·녹장포·무희목 등은 『제주읍지』에 와서는 폐지되고, 그 대신 통개(筒箇)와 치자(梔子)가 추가되었다. 그리고 말은 마필 진상 항목으로 넘어갔으며, 더욱이 19세기 중엽에 이루어진 『탐라지초본』에 와서는 진상 품목이 백랍·노루가죽·치자·중소녹비 등으로 줄어들었다.


[해산물 진상]
바다에서 생산되는 특산물로는 전복·해삼·미역·옥돔 등 그 종류가 다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특산물의 채취는 누구나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해산물의 진상을 위하여 포작인과 잠녀를 특별히 두어서 이들로 하여금 진상에 필요한 해산물을 마련하도록 하였다.

포작인은 주로 전복과 고기 등을 주로 잡아서 진상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반면에 잠녀는 미역·청각·우뭇가사리 등의 해조류와 조개류 등을 주로 채취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진상용뿐만 아니라, 관아에서 쓰이는 물품들도 모두 담당하였다.

관아에서는 이들의 장부를 마련하여 1년에 포작인은 20필, 잠녀는 7~8필에 해당하는 많은 액수를 부과하였다. 따라서 포작인과 잠녀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으며, 제주 지방에서는 이 역이 모두 고역으로 인식되어 6고역에 포함되고 있었다.

포작인들은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여 조선 초부터 가족을 거느리고 육지로 도망가는 현상이 빈번하였다. 영조 14년(1738)에 평역미를 설치하여 포작인의 역을 경감시키고자 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1843년(헌종 9)에는 포작역에게 맡겨지던 역이 다른 곳에서 대행하게 하는 조치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포작인들은 관아 선박의 사공으로 차출되는 등 그들의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한편, 1794년(정조 18)에는 잠녀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말리지 않은 미역의 경우, 정해진 액수 외에는 거두지 못하도록 하는 한편, 지방 관아에서 무역을 위해 마련했던 말린 미역의 수납을 폐지하는 결정이 내려졌다. 그러나 1814년(순조 14)에야 실행에 옮겨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녀의 고통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약재 진상]
약재의 진상을 위해 1672년(현종 13)에 제주 지역에 의국(醫局)을 설치하였고, 경종이 즉위한 1720년에는 약국을 설치하여 삼읍회춘국(三邑回春局)이라 칭하였다. 약국은 우연당 남쪽, 즉 지금의 관덕정 부근에 위치해 있었으며, 여기에는 심약(審藥) 1명, 의생(醫生) 14명, 약한(藥漢) 20명을 배치하였다, 진상용 약재 및 지방관아에서 사용할 약재의 채취는 바로 약한들이 담당하였다.

또한 제주읍성 내에 있던 신과원(新果園) 북쪽에는 약포(藥圃)를 두어 채취하기 힘든 약재는 직접 재배하여 진상에 대비하기도 하였다. 진상 약재의 종류, 세종 때의 지방 약재 통계표에 따르면, 제주목 28, 정의현 14, 대정현 12로 다른 지방에 비하여 그 종류가 훨씬 많았다.

여름에 채취한 약재는 바로 진상하면 곰팡이가 쓸기 쉬우므로 불에 쪼여 봉해두었다가 장마가 그치면 진상하였다. 봄·가을·겨울에 채취한 약재는 건조되는 대로 바로 진상하였다.


[귤 진상]
1. 귤 재배와 진상
조선시대 제주에는 귤의 진상을 위하여 곳곳에 과수원을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경국대전』의 규정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제주·정의·대정 삼읍에서는 매년 귤나무를 새로 심거나 접붙이기를 하여 인근 주민들로 하여금 재배하도록 하였는데, 매 12월에는 새로 심거나 접붙이기를 한 수량을 왕에게 보고하도록 하였다.

본격적인 과수원의 조성은 1526년(중종 21) 이수동 목사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 후 기존의 과원들을 관아 소속의 과원으로 계속 설치하여 나갔고, 1530년(중종 25)경에는 과원의 수가 제주목 19곳, 정의현 5곳, 대정현 6곳으로 모두 30곳에 이르렀다.

그 후 제주목에 3곳, 정의현에 2곳이 증치되어 1653년(효종 4)에는 모두 35곳에 과원이 운영되었다. 그리고 이형상 제주목사 당시에는 과원의 수가 42곳으로 증가하였다.

과원에는 모두 돌담을 쌓고 방풍과 주민들이 훔쳐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돌담 주위에 방풍림을 심었으며, 나아가 군인에서 점차 과수원을 지키는 소위 과직(果直)을 두어 과수원을 운영해나갔다.

그러나 과직들의 고통은 매우 심하여서 제주도민들은 과직으로 차출되는 것을 매우 기피하였다. 왜냐하면 감귤이 열매를 맺어 어느 정도 크기 시작하면, 관아에서는 장부를 들고 와서 일일이 귤나무마다 열매의 수를 장부에 기록하였다가 원래의 숫자대로 귤을 징수하였다.

관아 소속의 과원만으로는 조정에서 요구하는 귤을 마련할 수가 없었다. 이에 관아에서는 각 집마다 귤나무 여덟 그루를 재배하여 그 열매를 관아에 상납하면, 한 사람의 1년 역(役)을 면제해주는 방안을 마련하였다.

과거 제주도의 집 울타리에 귤나무가 한두 그루씩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관아에서 귤이 익기도 전에 장부를 가지고 와서 일일이 열매에다가 방점을 찍어서 그 수를 헤아려서 나중에 징수해갔기 때문에 도민들은 자연적으로 떨어져버린 귤의 수까지 부당하게 책임을 져야했다. 이러한 이유로 도민들은 귤나무가 오히려 ‘고통을 주는 나무’라 하여, 몰래 귤나무에 더운물을 끼얹어서 고사시켜버리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귤은 제사용 혹은 외국이나 국내 손님 접대용으로 주로 조정에서 이용하였다. 대체적으로 귤의 진상은 가장 일찍 익는 당금귤·금귤에서부터 시작하여 매 10일 간격으로 20차례 조정에 진상하였다.

진상 시기가 되면 제주목 관아의 동헌(東軒)에서 진상용 귤을 담기 위한 상자를 마련하고, 상자에 귤을 담아 봉하여 진상하였다. 이러한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한편에서는 제주목사 등 관리들은 기생들을 불러 모아놓고 거문고를 타면서 풍악을 즐겼다.

귤을 일일이 따지 않고 가지에 붙어 있는 채로 귤을 진상하기도 하였다. 또한 저장할 수 있는 귤은 저장해두었다가 4~5월에 진상하기도 하였다. 관아에서는 귤나무의 번식을 위하여 씨를 받아서 심거나, 혹은 접을 붙여 그 수를 확대해나갔다. 숙종은 직접 당금귤의 종자를 제주에 내려 재배하도록 지시하기도 하였다.


2. 귤 진상의 폐단
귤의 진상과 관련하여 많은 폐단이 발생하였다. 진상 기일이 너무 오래 소요되어 진상용 귤을 운반하는 도중에 귤이 썩어버리는 경우가 많아졌고, 이 경우에 진상 관리들이 문책을 당하였다.

물론 진상용 귤을 실어온 수고에 보답하는 의미에서 조정에서 옷과 쌀을 하사한 경우도 없지는 않았다. 또한 진상용 귤을 운반하다가 태풍을 만나 표류하는 경우도 많았다.

한편, 선조 때부터는 제주에서 그 해의 첫 귤을 진상하면 성균관 유생들에게 감귤을 나누어주면서 과거를 실시하는 것이 하나의 관례로 정착되기도 하였다. 이를 감제(柑製) 혹은 황감제(黃柑製)라 하였는데, 수석으로 급제한 자에게는 전시에 바로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으며, 차점자 등에게는 향시나 한성시에 30%의 가산점을 주거나 상을 하사하였다.


[기타 진상물]
해산물이나 약재 외에 제주 특산물 진상품목 중에는 국가의 제사용으로 쓰였던 검은 소는 매년 20두, 백편두(콩의 종류), 재목용으로 쓰인 무환자, 식용의 표고버섯, 사슴꼬리, 사슴 혀, 노루, 꿩, 멧돼지, 갓의 재로로 쓰인 양태 등 다양하였다.

1425년(세종 7)에 제주에서 바치던 날짐승인 매의 진상을 금지하거나, 1436년(세종 18)에 제주안무사 최해산이 원숭이를 진상한 바가 있었던 것으로 볼 때, 이러한 물품의 진상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폐단]
진상품 종류의 다양함과 액수의 과다로 인하여 제주도민들이 부담하는 진상은 애초부터 무리였다. 더구나 도민들 가운데 육지로 도망간 자들이 많아지면서 인구가 줄어들었지만, 진상 액수는 줄어들지 않아 더 심한 고통을 받았다.

또 진상물을 마련한다는 이유로 제주목사는 6~7월의 농사철에 백성들을 무리하게 동원하여 산에서 나무로 집을 짓고는 여러 날 동안 사냥함으로써 농사철을 잃는 경우도 많았다.

그리고 해마다 초겨울에 제주도의 모든 군인들을 동원하여 진상용으로 바치는 것 외에 노루와 사슴 등 짐승을 포획하는 폐단도 발생하였다. 이렇게 마련된 물품은 사사로이 진상 물품을 가지고 가는 진상인들이 이를 가지고 가서 뇌물로 바치거나, 한양에서 이를 팔아 제주도에서 생산되지 않은 물품을 사서 바치는 것이 거의 관례화되는 폐단이 발생하였다.

더구나 제주에서 제대로 생산되지도 않은 진주·앵무목·무회목 등의 진상물을 무리하게 도민들에게 강요하는 폐단도 적지 않았다. 해산물에 있어서 진상하는 전복의 수량이 매우 많았고, 제주 지방 관리들이 거짓으로 진상으로 바칠 것이라고 하여 개인적인 욕심을 채우는 것도 그 몇 배에 이르렀다.

이에 대부분의 포작인들은 그 일에 견디지 못하여 도망하거나 익사하여 10명 중 2~3명만이 살아남는 실정이었다. 나아가 목사나 현감들이 민간 사람들로부터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진주 목걸이나 귀막이·무명·모시·포·철 등을 마구 거두어 중앙의 관리들에게 뇌물로 바치거나 돈놀이를 일삼기도 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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