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령 동정 귤나무
제주도 광령의 귤나무는 옛 기록에 나와있는 제주산 재래귤 중에서 멸종된 것으로 알려진 동정귤로, 마을주민들은 ‘돈진귤’또는 ‘진귤’이라 부른다. 나무의 크기는 6m이며, 나이는 250여 년이 넘은것으로 추정된다. 북쪽 가지는 1949년 제주민중항쟁 때 불에 타서 죽고, 남쪽으로만 가지가 뻗어 있으나, 열매를 많이 맺어 지금도 해마다 100㎏ 이상을 수확하고 있다. 과실의 향기와 맛이 독특하여 지난날 세금으로 바쳤던 지방 특산물 중에서도 상품에 속했음을 짐작케 한다. 과실은 보통 온주 밀감보다 약간 작으며, 과일 껍질은 다소 거칠고 향기와 신맛이 강하다.
광령 귤나무는 과거 기록에 나와있는 제주산의 재래귤 중 멸종된 것으로 알려졌던 희귀한 식물로 학술적인 연구와 보존가치가 높아 제주도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제주도에서 감귤을 조정에 진상했을까? 『고려사』에 보면 1052년 고려 문종 6년에 “임신일에 삼사(三司, 재정을 맡아보던 기관)에서 탐라국에서 해마다 바쳐오는 감귤의 정량을 100포로 개정하여 항구적인 규정으로 삼자고 제의하니 왕이 이 말을 좇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한 기록으로 보아 제주 감귤의 진상은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제주도 북제주군 애월읍 광령리에 있는 귤나무. 제주도 기념물 제26호. 높이 6m. 수령은 약 250년을 넘은 것으로 추정되며 멸종되었던 것으로 알려졌던 제주도의 재래귤인 동정귤이다.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26호. 이 귤나무는 제주도의 재래귤의 일종이며 지난날 기록에 나와 있는 이곳 재래귤로서 멸종되었던 것으로 알려진 동정귤이며 희귀한 식물로서 학술적으로 보존할 가치가 높아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 귤나무는 그곳 사람들이 ‘돈진굴’ 또는 ‘진굴’이라 부르고 있다. 이 나무는 열매의 특징이나 나무의 형태적 특징이 조사되어 동정귤로 밝혀졌고 제주도에서 지금까지의 유일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나무의 나이는 약 250년을 넘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당초의 수형은 개장성(開張性)이였으나 4·3사건 당시 북쪽의 가지가 불에 타서 죽었고 지금은 남쪽가지만 남아 있다. 고목이 된 지금도 결실량이 많아 해마다 100㎏이상의 수확을 올리고 있으며 열매의 맛과 향기가 독특하여 지난날 귤공물 중에서도 상위에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열매 한 알의 크기는 50∼80g이고 현재 재배되고 있는 온주밀감보다 약간 작은 편이며 과피는 다소 거칠고 산미와 향기가 다소 강한편이다. 나무의 높이는 6m, 수관은 남쪽으로 치우쳐 6m쯤 확장되어 있다.
진상품관련근거
동정귤(洞庭橘)은 제주도 제주목에서 진상하였다는 기록이 역주 탐라지, 제주대정정의읍지, 여지도서보유편, 탐라록, 세종실록지리지, 춘관통고,공선정례, 고려사에 기록되어있다.
종 목;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26호
명 칭; 광령귤나무 (光令橘나무)
분 류; 자연유산 / 천연기념물/ 생물과학기념물/ 생물상
수량/면적; 1주
지정(등록)일; 1974.04.03
소 재 지; 제주 제주시 애월읍 광령1리 1165번지
관리자(관리단체);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상 세 문 의; 제주도 제주시 문화예술과 064-728-2731~5
조선시대인 1392년의 『태조실록』에는 ‘그때까지 상공(常貢)으로 받아오던 감귤을 별공(別貢)으로 한다’는 기록이 있고, 『세종실록』에는 ‘전라도 남해안까지 유자를 심어 시험 재배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대전회통(大典會通)』에는 ‘상벌제도를 두어 귤나무 재배를 장려했다’는 기록이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제주목’ 「토산」조에 “귤에는 금귤(金橘)ㆍ산귤(山橘)ㆍ동정귤(洞庭橘)ㆍ왜귤(倭橘)ㆍ청귤(靑橘) 등 다섯 종류가 있다. 청귤은 열매를 맺어 봄이 되어서야 익고 때가 지나면 다시 말랐다가 때가 이르면 다시 익는다”라고 실려 있다.
감귤은 다른 과일과 같이 날이 따뜻한 곳에서 자라기 때문에 제주도에서만 재배되었고, 현대에 이르러서 남해안 일대에서도 재배가 되지만 그 수가 아직도 미미하다.
이와 같은 감귤에 대한 진상제도는 1894년 조선 고종 31년에 폐지되었다. 하지만 당시 제주도민들은 생산량을 채우지 못하면 불이익을 받았기 때문에 한동안 감귤 식재를 기피했다.
현재 제주에 남아 있는 재래종 감귤은 유자ㆍ사두감ㆍ병귤ㆍ동정귤ㆍ홍귤ㆍ소유자ㆍ청귤ㆍ진귤ㆍ지각 등 10여 종에 불과하다. 제주도에서는 재래종 감귤을 ‘잡감’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열매가 늦게 익는다고 ‘만감’이라고 부른다. 지금 제주도에서 재배되는 감귤은 대부분이 1911년 일본에서 도입된 온주밀감을 비롯한 몇 종류의 재배종이다.
조생품종으로는 온주계통의 흥진조생(興津早生)ㆍ삼보조생(三保早生)ㆍ궁천조생(宮川早生) 등이 있다. 보통 온주계통의 미택온주(米澤溫州)ㆍ남감 20호ㆍ삼산온주(杉山溫州)ㆍ청도온주(靑島溫州) 등이 오늘날 재배되고 있는 감귤이다.
식민지 시대에 일본 사람이 들여온 온주밀감이 근대식 감귤농원에서 재배되기 시작했다. 감귤이 귀하던 시절에는 감귤나무 몇 그루만 있으면 자식을 대학에 보낼 수가 있다고 해서 감귤나무가 ‘대학나무’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1960년대부터 대량으로 재배되기 시작하면서 그 옛날의 대접을 받지 못하게 되었고, 기호식품을 벗어나 대량 소비단계로 접어들었다.
우리 나라에서 감귤이 재배된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일본의 문헌인 ≪비후국사 肥後國史≫에 삼한에서 귤을 수입하였다는 기록과 ≪고사기 古事記≫·≪일본서기≫에 신라 초기에 지금의 제주도인 상세국(桑世國)으로부터 귤을 수입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삼국시대에 재배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사≫에는 1052년에 탐라에서 세공으로 바쳐오던 감귤의 양을 1백 포로 늘린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시대의 ≪태조실록≫에는 1392년에 그때까지 상공(常貢)으로 받아오던 감귤을 별공(別貢)으로 한다는 기록이 있다. ≪세종실록≫에는 전라도 남해안지방까지 유자를 심어 시험재배하게 한 기록이 있고, ≪대전회통≫에는 상벌제도를 두어 귤나무 재배를 장려한 기록이 있다.
≪동국여지승람≫의 제주목조(濟州牧條)에 보면 감에는 황감(黃柑)·유감(遊柑) 등이 있고, 귤(橘)에는 금귤(金橘)·산귤(山橘)·동정귤(洞庭橘)·왜귤(倭橘)·청귤(靑橘)이 있다고 되어 있다. 특히 청귤은 다른 감귤과 달라 봄이 되면 익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감귤은 기온에 민감하며, 특히 겨울철의 온도조건이 부적당하면 다른 재배조건이 아무리 좋더라도 재배가 어렵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많이 재배하고 있는 온주밀감은 연평균기온이 15℃ 이상으로, 1·2월의 월평균기온이 5℃ 이상이고 최저기온이 -5℃ 이하로 내려가지 않는 곳이라야 안전하지만, 대체로 -6℃ 이하가 10년에 3회 이내인 곳을 적지로 보고 있다.
연간강우량은 1200∼1500㎜가 적합하고, 토질은 중점토나 사질토를 제외하고는 어느 토질이나 재배가 가능하다. 토양이 얕은 곳은 겨울철의 한해나 여름철 건조의 해를 받기 쉬우며, 각종의 장해를 일으키기 쉽기 때문에 토층이 깊은 토양으로 보수(保水)·보비력(保肥力)이 적당한 것이 적합하다. 산성토양에는 강한 편이나 적정산은 pH 5∼6이다.
묘목의 번식은 4월 중·하순에 행하는 가지접이나 9월 중·하순경에 행하는 눈접으로 실시한다. 대목으로는 탱자나무·유자나무·하귤나무 등이 이용된다. 재배되고 있는 주요 품종으로는 조생온주계통의 흥진조생(興津早生)·삼보조생(三保早生)·궁천조생(宮川早生) 등과, 보통 온주계통의 미택온주(米澤溫州)·남감20호·삼산온주(杉山溫州)·청도온주(靑島溫州) 등이 있다.
제주도의 귤은 옛날부터 신기한 과일로 동지 때가 되면 귤을 조공하였고, 나라에서는 제주목사에게 포백을 하사하였다. 또, 귤이 대궐에 들어오면 이를 축하하기 위하여 성균관과 동·서·남·중의 4개 학교의 유생들에게 과거를 보이고 감귤을 나누어 주었다. 이것을 감제(柑製) 또는 황감제(黃柑製)라고 하였다. 반면에 제주에서는 더 많은 귤을 생산하기 위하여, 열매가 맺으면 관에서 열매 하나하나에 꼬리표를 달고 하나라도 없어지면 엄한 형을 주었다.
또한, 아전들은 이를 빌미로 엄청난 수탈을 감행하여 나무를 통째로 뽑아버리는 수가 허다하였으며, 그 생산량이 크게 줄었다고 한다. 김상헌(金尙憲)의 ≪남사록 南槎錄≫에도 “해마다 7, 8월이면 목사는 촌가의 귤나무를 순시하며 낱낱이 장부에 적어두었다가, 감귤이 익을 때면 장부에 따라 납품할 양을 조사하고, 납품하지 못할 때는 벌을 주기 마련이었다. 이 때문에 민가에서는 재배를 하지 않으려고 나무를 잘라버렸다.”고 되어 있다.
오늘날 제주에 남아 있는 재래의 감귤은 10여 종에 불과하며, 대부분이 1911년 일본에서 도입된 온주밀감을 비롯한 몇 종류의 재배종이다. 급격한 재배지의 확장은 1960년 초반기부터이다. 그 뒤, 감귤의 생산량은 해마다 급증되어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감귤이 기호식품의 범주를 벗어나 대량소비단계로 접어들었고, 최근에는 음료수 등 가공소비가 급증해서 재배면적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
제주 감귤은 대학나무
오래전부터 임금님께 진상했던 제주 감귤은 일명 대학나무로 통했다. 감귤이 귀하던 시절에는 감귤나무 몇 그루만 있으면 자식을 대학에 보낼 수가 있다고 해서 감귤나무가 귀한 대접을 받았다. 지금은 시설 재배를 하면서 한라봉 같은 개량종이 생산되고 있다.
조선시대 애물단지였던 감귤
1702년 이형상 목사가 편찬한 ‘탐라순력도’ 중 ‘감귤봉진(柑橘封進)’이라는 그림은 나라에 진상할 감귤을 검사하고 포장하는 장면이다. 귤은 음력 9월부터 시작하여 매 10일 간격으로 1운(運)에서 20운까지 진상되었는데, 이 그림은 제사에 쓰는 천신용(薦新用)으로 2차 진상 21운에 해당되며, 날짜는 적혀 있지 않아 정기 진상인지의 구별이 명확치 않다.
병사들이 삼엄하게 지켜보는 가운데, 애매헌 앞에서는 길쭉한 포장용 상자를 만들고 옆에서는 사이에 넣을 짚을 고르고 있는 그림인데, 망경루 앞으로 여인들이 귤을 잘 손질하며 세어 동헌에 앉아있는 목사 쪽으로 가져가면 그 앞에 앉은 관리들이 점검한다. 그 감귤이 대궐까지 올라갈 시기를 생각하면 한 달이 걸릴지 두 달이 걸릴지 몰라 썩지 않도록 신중히 포장했을 것이다.
그 그림에 이날 포장했던 귤의 내용은 당금귤(唐金橘) 678개, 감자(柑子) 25,842개, 금귤(金橘) 900개, 유감(乳柑) 2,644개, 동정귤(洞庭橘) 2,804개, 산귤(山橘) 828개, 청귤(靑橘) 876개, 유자(柚子) 1,460개, 당유자(唐柚子) 4,010개, 치자(梔子) 112근, 진피(陳皮) 48근, 청피(靑皮) 30근 등을 봉진했다는 기록이다. 더러는 종묘에 제사지낼 때 올리고, 더러는 신하들 나눠주고, 더러는 약제로 쓰고….
그러나, 지금처럼 비료나 농약도 없고 종자도 안 좋은 귤나무에서 해마다 그 수량을 채워 대는 일은 너무나 고역이었다. 관원들은 꽃이 지고 열매 맺기 바쁘게 그 수를 헤아려 진상을 요구했기 때문에 병충해나 바람으로 떨어져버린 개수까지 책임져야 했던 민가에서는 귤나무가 오히려 고통을 줘, 일부러 더운 물을 끼얹어 죽여 버리는 일도 허다했다.
참고문헌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7 : 제주도, 2012.10.5, 다음생각),(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식물도감(정태현, 신지사, 1956), 과수원예각론(이광연 외, 향문사, 1978), 백화전서(양인석, 송원문화사, 1983),(임경빈, 『산림』 244호, 1986),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역주 탐라지, 제주대정정의읍지, 여지도서보유편, 탐라록, 세종실록지리지, 춘관통고,공선정례, 고려사, 태조실록, 대전회통(大典會通), 동국여지승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