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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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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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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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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숭아
복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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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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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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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주
오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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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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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첩선(白貼扇), 흰부채,백반 첩선,흑칠사첩선,칠첩선(漆貼扇)
 

백첩선(白貼扇)은 부챗살과 부채 면에 아무런 장식이나 그림을 넣지 않은 흰 부채
 
진상품관련근거
백첩선(白貼扇)은 경상도(진주,통영) 전라도(고산현(완주),곡성,광양,광주,구례,나주,남평,능주,무장,무주,순창,순천,옥과,옥구(군산시),용안,운봉,임피,장성,장수,전주(완주),창평,태인,흥덕)에서 진상하였다는 기록이 여지도서에 기록되어있다.
 
성종 129권, 12년(1481 신축 / 명 성화(成化) 17년) 5월 16일(경인) 3번째기사 중국 사신과 만나서 여러 물품을 하사하고, 치사를 받다
아청 목면 단원령(雅靑木綿單圓領) 각각 1개, 초록주 겹답호(草綠紬裌褡胡) 각각 1개, 대홍주 남요선 겹철릭(大紅紬藍腰線裌帖裏) 각각 1개, 백저포 철릭[白紵布帖裏] 각각 1개, 백초 삼아(白綃衫兒) 각각 1개, 백초 단고(白綃單袴) 각각 1개, 백록피 협금 기자화(白鹿皮挾金起子靴)·전정 흑사피 투혜구(氈精黑斜皮套鞋具) 각각 1개, 흑초립(黑草笠) 각각 1개, 백첩선(白貼扇) 각각 30파(把), 안구마(鞍具馬) 각각 1필(匹)씩이었는데, 두 사신이 모두 꿇어앉아 받고 치사(致謝)하였다.

성종 156권, 14년(1483 계묘 / 명 성화(成化) 19년) 7월 2일(임진) 2번째기사  태평관에 거둥하여 하마연을 베풀다.
두 사신이 몸소 어좌(御座)를 들어 북쪽 가까운 곳으로 옮겨놓고, 또 먼저 주정(酒停)13720) 에 가서 잔을 들고 말하기를, “청컨대 전하께서 정면하여 서소서. 우리가 마땅히 먼저 술을 바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여기는 공관(公館)인데, 어떻게 감히 이럴 수 있겠소?”
하자, 상사(上使)가 말하기를, “우리는 본토(本土)의 백성이므로 이 예(禮)를 행하려 하니, 원컨대 가엾이 여겨 주소서.” 하니, 임금이 마지못하여 그대로 따랐다. 상사가 먼저 쌍배(雙杯)를 바치고, 임금도 쌍배로 답하였으며, 부사(副使)도 그렇게 하였다. 오산군(烏山君) 이주(李澍)가 술을 돌릴 때에 상사가 ‘전하께서 먼저 받으소서.’라고 청하므로 임금이 사양하였으나, 두 사신이 굳이 청하므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두 사신이 일어나 중문(中門)까지 나와서 공경히 전송하였고, 임금이 도승지(都承旨) 이세좌(李世佐)에게 명하여 남아서 두 사신에게 인정(人情)13721) 을 주게 하였는데, 각각 아청 목면 원령(鴉靑木綿圓領) 1개, 초록주 겹탑호(草綠紬裌搭胡) 1개, 대홍주 남요선 겹철릭(大紅紬藍腰線裌帖裏) 1개, 백저포 철릭(白苧布帖裏) 1개, 백초 삼아(白綃衫兒) 1개, 백초 단고(白綃單袴) 1개, 흑초립(黑草笠) 1개, 백첩선(白疊扇) 30자루[柄], 안구마(案具馬) 1필(匹), 사장부 유석(四張付油席) 4장(張), 인삼(人蔘) 20근(斤), 호초(胡椒) 12근이고, 두목(頭目) 41인에게는 각각 유청주 단철릭(柳靑紬單帖裏) 1개, 흑초립 1개, 백첩선 5자루이었다.

선조 162권, 36년(1603 계묘 / 명 만력(萬曆) 31년) 5월 25일(경진) 4번째기사  예조에서 단오에 진상할 물품에 대해 아뢰다 .
예조가 아뢰기를, “단오(端午)에 진상할 물건에 대해 호조에서 보내온 횡간(橫看)을 고찰해 보고 낱낱이 단자(單子)에 등서해 입계합니다. 지난해 5월 승전(承傅)한 내용에 ‘사의(蓑衣)를 봉진하는 도(道)가 있을 텐데 빠졌으니, 소급해 준비하여 봉진하게 하라.’고 전교하셨었는데, 횡간 안에 사의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니, 그 연유를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평소에 사의 봉진을 어느어느 도가 했었는지 모르겠다. 각도에 물어보거나, 이에 대한 규정이 강무도(講武圖)에 있을 듯하니, 다시 잘 살펴서 시행하라. 그리고 전라도의 백첩선(白疊扇)을 3년 동안은 3백 파(把)로 줄이고, 각도에서 봉진할 원래의 수효 중에서 절반은 올해의 예대로 백첩선 1파 대신에 유선(油扇) 2파를 봉진하게 하라.”
하였다. 【양남(兩南) 감사의 장계에 ‘민간에서 백첩선 1파를 만드는 대나무의 값이 쌀 24∼25말이다.’고 하였으므로 이 분부가 있은 것이다. 】 

 
공조에서 진상하는 단오진선의 숫자에 대해 『만기요람(萬機要覽)』 재용편(財用篇)에는 대전(大殿)에 오십죽 백반 첩선(五十竹白斑貼扇) 한 자루, 사십죽 백반 첩선(四十竹白斑貼扇) 두 자루, 사십죽 백첩선(四十竹白貼扇) 백 자루, 식선(食扇) 두 자루이며, 중궁전에 오십죽 주반사 첩선(五十竹朱斑紗貼扇) 한 자루, 사십죽 백반 첩선 두 자루, 사십죽 백첩선 사십 자루, 식선 두 자루이다. 왕대비전에는 오십죽 주반사 첩선 한 자루, 사십죽 백반 첩선 두 자루, 사십죽 백첩선 팔십 자루, 식선 두 자루이며, 혜경궁(惠慶宮: 사도세자 빈 홍씨의 궁호, 정조의 어머니)에는 오십죽 주반사 첩선 한 자루, 사십죽 백반 첩선 두 자루, 사십죽 백첩선 팔십 자루, 식선(食扇) 두 자루이고, 가순궁(嘉順宮; 유빈 박씨의 궁호. 순조의 사친)에는 오십죽 주반사 첩선 한 자루, 사십죽 백반 첩선 두 자루, 사십죽 백첩선 오십 자루, 식선 두 자루로 기록되어 있다.
 
『만기요람』보다 늦은 고종 때 편찬된 『육전조례(六典條例)』 공전(工典) 진상(進上)의 단오진상에 “오십죽 백반 첩선은 각 전궁에 한 자루로 하되 내전에는 주반사 첩선, 순화궁(順和宮: 헌종의 후궁 경빈 김씨)에는 흑칠사첩선(黑漆紗貼扇)으로 한다. 사십죽 백반 첩선은 각 궁전에 두 자루로 한다. 사십죽 백첩선은 대전에 백 자루, 자전에 각 팔십 자루, 중궁전 사십 자루, 순화궁에 열 자루로 한다. 식선은 각 전에 두 자루, 순화궁에 한 자루로 한다.”라는 기록이 있어 공조에서 각 궁에 진상하는 단오선의 숫자는 조선 초기부터 위의 기록과 동일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세시풍속사전, 국립민속박물관)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의 기록에 의하면 왕이 하사한 부채 중에는 흰 댓살이 40개 내지 50개나 되는 매우 큰 것이 있는데, 이것은 백첩선(白貼扇)이라고 하며 옻칠을 한 부채는 칠첩선(漆貼扇)이라고 했다. 이것을 받은 사람들은 대개 흰 종이에 금강산 일만 이천 봉우리를 그려 넣는다.
≪통문관지 通文館志≫에는 조선시대에 우리 나라 사신 세 사람이 일본에 갔을 때에도 국교품으로서 부채를 가져갔다. 선물처와 수량을 적어보면, 대마도 관계로는 부채 215자루와 대첩선(大貼扇) 3자루, 대판(大阪)·경도(京都) 관계로는 부채 215자루, 에도(江戶 : 지금의 東京) 관계로는 부채 60자루, 백첩선(白貼扇) 8자루, 첩선(貼扇) 36자루이다.
이와 같이 일본에도 상당한 수량의 부채가 우리 나라에서 나갔던 것이다. 그런데 일본 도쿠가와시대(德川時代)에는 우리 나라의 부채를 모방하여 만들었으니 그들의 ‘조선골선(朝鮮骨扇)’이라는 것이 그것이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조 162권, 36년(1603 계묘 / 명 만력(萬曆) 31년) 5월 25일(경진) 4번째기사 예조에서 단오에 진상할 물품에 대해 아뢰다
예조가 아뢰기를, “단오(端午)에 진상할 물건에 대해 호조에서 보내온 횡간(橫看)을 고찰해 보고 낱낱이 단자(單子)에 등서해 입계합니다. 지난해 5월 승전(承傅)한 내용에 ‘사의(蓑衣)를 봉진하는 도(道)가 있을 텐데 빠졌으니, 소급해 준비하여 봉진하게 하라.’고 전교하셨었는데, 횡간 안에 사의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니, 그 연유를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평소에 사의 봉진을 어느어느 도가 했었는지 모르겠다. 각도에 물어보거나, 이에 대한 규정이 강무도(講武圖)에 있을 듯하니, 다시 잘 살펴서 시행하라. 그리고 전라도의 백첩선(白疊扇)을 3년 동안은 3백 파(把)로 줄이고, 각도에서 봉진할 원래의 수효 중에서 절반은 올해의 예대로 백첩선 1파 대신에 유선(油扇) 2파를 봉진하게 하라.”

성종 129권, 12년(1481 신축 / 명 성화(成化) 17년) 5월 16일(경인) 3번째기사 중국 사신과 만나서 여러 물품을 하사하고, 치사를 받다
아청 목면 단원령(雅靑木綿單圓領) 각각 1개, 초록주 겹답호(草綠紬裌褡胡) 각각 1개, 대홍주 남요선 겹철릭(大紅紬藍腰線裌帖裏) 각각 1개, 백저포 철릭[白紵布帖裏] 각각 1개, 백초 삼아(白綃衫兒) 각각 1개, 백초 단고(白綃單袴) 각각 1개, 백록피 협금 기자화(白鹿皮挾金起子靴)·전정 흑사피 투혜구(氈精黑斜皮套鞋具) 각각 1개, 흑초립(黑草笠) 각각 1개, 백첩선(白貼扇) 각각 30파(把), 안구마(鞍具馬) 각각 1필(匹)씩이었는데, 두 사신이 모두 꿇어앉아 받고 치사(致謝)하였다.

중종 92권, 35년(1540 경자 / 명 가정(嘉靖) 19년) 1월 20일(계축) 2번째기사 중국 사신에게 보낼 물품을 전하다
전교하기를, “화(華)·설(薛) 두 중국 사신에게는 각각 벼루 2면(面), 여섯 폭 유석(油席) 3장(張), 견면지(繭綿紙) 60장, 백첩선(白貼扇) 50파(把), 입모(乏帽) 30매(枚)를 보내라. 공 사신(龔使臣)에게는 큰 벼루 3면, 여섯 폭 유석 3장, 견면지 1백장, 백첩선 1백파, 입모 50매를 보내라. 화 사신에게 따로 소세양(蘇世讓)이 회봉(回奉)19257) 할 벼루가 있기 때문에 앞서 정한 숫자에서 1면을 감한 것이다.”
하고, 또 전교하였다.

참고문헌
여지도서, 조선왕도실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세시풍속사전, 국립민속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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