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래
가물치
가지
간재미
갈근
갈치
감자
감태
감초
감홍로주
강활
강황
게장
고구마
고등어
고본
고사리
고슴도치
고추
고추장
곤쟁이
골풀
곰취
곱돌
과루인
곶감
과메기
곽향
광어
구기자
구리
국수
국화차
굴비
금불초
기장
김치
꼬막
꼴뚜기
꽃게
꿀풀
나물
나전칠기
낙죽장도
낙지
냉이
노루
녹두
녹용
녹차
농어
뇌록
누치
느룹나무
느타리버섯
다시마
다람쥐
다래
다슬기
닥나무
단감
단목
달래
담비
담쟁이
당귀
대게
대구
대나무
대발
대추
더덕
더덕주
도라지
도루묵
도마뱀
도미
도자기
돈육
돈차
돌미역
돔배기
동래파전
동백기름
동충하초
돚자리
돼지
된장
두꺼비
두릅
두충
딸기
들기름
마늘
마뿌리
만화석
막걸리
망둥어
매생이
매실
맥문동
맨드라미
머루
머루주
메밀차
멸치
명란젓
명설차
명태
모과
모란
모래무지
모시
모자
목기
목화
무명
무우
문배주
문어
미나리
미역
민속주
민어
밀랍
박하
방풍
백랍
백련잎차
백렴
백미
백반
백부자
백조어
백하수오
백합
밴댕이
뱅어
벼루
병어
법주
보골지
보리
복령
복분자
복숭아
복어
부들
부자
부채
부추
붉나무
붕어
비빔밥
비자
뽕나무
사과
사슴
산나물
산삼
삼림욕
산수유
살구
삼릉
삼배
삼치
상합
상황버섯
새우
새우젓
생강
석결명
석곡
석류
석영
석이버섯
석청
석창포
소금
소라
소주
속새
송어
송이버섯
송화가루
수달
수박
수정
숙주
순채
숭어
승검초
식해
안동포
안식향
앵두
야콘
야콘잎차
약쑥
양귀비
어란
어리굴젓
어육장
엄나무
연밥
연어
연엽주
열목어
염전
엽삭젓
오가피
오미자
오곡
오골계
오정주
오죽
오징어
옥돔
옥로주
옹기
옻칠
왕골
용문석
우무
우황
울금
웅어
위어
유기
유자
유자차
유황
육포
은어
은행
이강주
이스라지
익모초
인삼
인삼주
잉어
자단향
자두
자라
자라돔
자연동
자하젓
작설차
작약
장군풀
장아찌
전모
전복
전어
전어젓
전통주
젓갈
젓새우
정어리
조개
조기
조홍시
좁쌀
종어
종이
주꾸미
죽렴장
죽로차
죽순
죽순채
죽염멸치
죽엽청주
죽피
죽합
준치
중국차
지라돔
지치
질경이
찐빵
참가사리
참게
참기름
참죽나물
참외
찹쌀
창출
천궁
천남성
천문동
청각
청국장
청란석
청목향
청자
초콜릿
초피나무
초하주
추성주
취나물
치자
칠선주
콩잎
토마토
토끼
토사자
토주
토파즈
토하젓
파전
패랭이
편두
포도
포도주
표고버섯
표범
하늘타리
학슬
한과
한라봉
한우
한지
해구신
해달
해삼
해파리
해홍나물
향나무
호도
호로파
호두
홍삼
홍삼절편
홍시
홍어
홍주
홍합
화개차
화문석
황기
황률
황벽나무
황어
황옥
황진이주
황태
회양목
후박
후추
흑돼지
흑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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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귤, 산물, 산귤,산귤나무,참귤나무ㆍ감자(柑子)ㆍ감귤ㆍ온주밀감, 산귤은 제주도(제주목)에서 왕대비전, 혜경궁, 중궁전, 세자궁, 대전에 진상하였다는 기록이 여지도서, 춘관통고, 공선정례…
 

산귤나무(진귤=산물=산귤)
제주자생 재래감귤종이 하나인 진귤(Citrus sunki Hort. ex Tanaka), 산물, 산귤의 과피는 전통적으로 매우 중요한 한약재 성분으로 사용되어 왔으나 그 약리학적 효과에 대해서는 과학적인 분석이 되어 있지 못하다. 본 연구에서는 진귤과피추출물과 과피발효 추출물의 1차 항산화활성을 검색하여 발효 후 추출물이 더욱 효과적인 활성을 가지고 있는 사실을 발견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대식세포인 Raw264.7세포에서 산화질소의 생성, 염증유발 단백질(NOS2, Cox-2)의 수준을 억제할 뿐 아니라 동 세포의 생존능을 개선시키는 결과를 얻었다. 그러나 상피세포유래 세포주인 CHO-IR 세포 및 사람의 간암세포주인 HepG2 세포의 생존능은 반대로 발효후 추출물에 의해 억제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결과들은 진피의 발효후 추출물이 대식세포의 항염증활성을 증가시키는 반면, 종양세포의 증식을 억제하고 세포사멸을 유도하는 다양한 약리효과를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정의]
제주특별자치도에서 재배되었던 쌍떡잎식물 쥐손이풀목 운향과에 속하는 귤나무.

[개설]
제주도 내 재배되었던 재래종으로서 각처에 노목으로 많이 남아있다. 흔히 산물 또는 진귤로 불리워지며 분포가 넓고 재배 본수도 많다.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도련동 고전만, 고전휴 집에서 자라고 있는 산귤나무 2그루의 나이는 250년 정도로 추정된다. 1998년에 제주도기념물 제20호로 지정, 보호되다가 2006년에 1그루가 고사되어 1그루만 있다.

[형태]
수세는 왕성하고 가지가 밀생하며 가지의 마디가 짧다. 잎은 좁은 타원형으로 작으며, 잎날개가 없다. 잎의 길이는 4.5~7.5㎝, 너비 2~3㎝이며, 잎자루의 길이는 0.5~1㎝이다.
열매는 둥글고 편평하며, 열매 껍질에는 약간의 돌기가 있다. 열매의 지름은 세로 3~4㎝, 가로 3.5~4.5㎝이며, 내과피는 9실 내외로 되어있으며, 씨앗의 수는 20개 내외이고 열매의 무게는 약 25~30g이다. 주로 감기로 인한 기침, 가래 등의 약재로 이용된다.

[역사적 관련사항]
산귤은 제주도에서 재래종으로 재배되었던 다른 귤나무 종류와 더불어 조공으로 상납되었던 품목 중의 하나였다. 이러한 내용은『세종실록지리지』에서도 백제 조정에 받쳐졌던 조공 품목으로 기록되어 있다.

[형태]
당유자는 재래 귤 중에서 과실이 가장 크고 과실의 무게는 250g 내외이나 큰 것은 500g인 것도 있다. 병귤은 흔히 관목상으로 자라며 열매는 과실부가 돌출된 형이어서 다른 재래 귤과 쉽게 구별된다. 산귤은 나무의 가지가 촘촘하게 나며 마디가 짧다. 껍질에 흔히 얕은 돌기가 있고 열매의 무게는 25~30g 정도이다.
진귤은 과실의 향기와 맛이 독특하며 과실의 크기는 50~80g 정도로 현재 재배되고 있는 온주밀감보다 약간 적으며 껍질은 다소 거칠고 산미와 향기가 약간 강하다. 꽃은 5~6월에 피며, 가지에는 탱자나무와는 달리 가시가 없다.

[역사적 관련사항]
1973년 2월 5일에 당유자나무 2그루, 산귤 2그루, 병귤 2그루 등 총 7그루가 제주도기념물 제20호로 지정되었고, 1976년에는 이 지역을 보호 구역으로 지정하여 보호되고 있다. 1997년에는 태풍에 의해 당유자나무 1그루가 훼손된 뒤 12월 31일에 기념물에서 해제되었으며, 당유자나무 1그루와 진귤 1그루가 추가 지정되었다. 2006년에 산귤나무 1그루가 고사되어 총 6그루가 있다.『제주향토기』라는 책에는 제주도에 14종의 재래 귤이 있다고 하였는데, 그 가운데 몇 종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제주시 도련1동에는 과거 조선시대 귤 재배지의 흔적을 남아 있으며, 오래된 귤나무가 집단적으로 남아 있기도 하다.

진상품관련근거
산귤은 제주도(제주목)에서 왕대비전, 혜경궁, 중궁전, 세자궁, 대전에 진상하였다는 기록이 여지도서, 춘관통고, 공선정례 기록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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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징 및 사용
참귤나무ㆍ감자(柑子)ㆍ감귤ㆍ온주밀감이라고도 한다. 가지는 퍼지고 가시가 없다. 귤나무라고 하면 운향과 감귤속에 속하는 상록 활엽 소교목의 총칭으로서 넓은 뜻으로는 감귤류 전체를 말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귤나무라고 하면 현재 제주도에서 주로 재배하고 있는 온주귤(온주밀감)을 말한다. 보통 온주귤을 밀감이라고도 하지만, 원래 학명이 Citrus nobilis인 밀감이 따로 있다. 이 밀감은 높이 3m 정도의 관목이며 잎의 생김새가 달걀꼴이다. 귤나무의 덜 익은 열매의 껍질을 청피(靑皮)라 하고, 익은 열매의 껍질을 진피(陳皮)라 하는데 진피를 쌀뜨물에 담갔다가 말려 쓴다. 방향성이 있다. 관상용ㆍ식용ㆍ약용으로 이용된다. 열매를 식용하는데 주로 생식한다. 한국의 귤 맛은 세계 제1급이다. 어떤 약에든지 넣으면 약효가 배가된다. 약으로 쓸 때는 주로 탕으로 하여 사용한다. 신체가 허약하거나 다한증이 있는 사람은 복용을 금한다.


익생양술 효능
주로 호흡기 질환과 건위에 효험이 있다.가슴답답증,각기,감기,거담,건위,고혈압,곽란,구토,기관지염,기미·주근깨,담,독두병,동맥경화,두통,멀미,변비,보간·청간,복랭,복만시통,복통,산후부종,상기,소갈증,소화불량,순진,습비,식욕부진,식적창만,어류(물고기) 먹고 체했을 때,실음,어골경,어혈,위궤양,위산과다증,위·십이지장궤양,위염,유방염,유종,유즙분비부전,자한,조루,주독,중독,진정,진통,취한,치은궤양,학질,해수,해열,행혈,협통,후두염,[소아질환]백일해,[소아질환]소아천식,


산귤은 가지가 밀생하며 가지의 마디가 짧고, 경침이 드물게 드러난다. 잎은 타원상피침형으로 엽익이 없고, 길이 4.5∼ 7.5㎝, 폭 2∼3㎝이다. 열매는 편구형으로 껍질에 흔히 얕은 돌기<突起>가 있고, 종경 3∼4㎝, 횡경 3.5∼4.5㎝로서 9실내외이고, 열매의 무게는 25∼30g 정도다. 제주어로는 '산물'이라고 한다. 이곳에 있는 산귤나무는 높이 6.4m, 근원둘레 2.2m, 흉고둘레 1m이다.

산귤 ; 시도기념물 20-5호
소재지 : 제주 제주시 도련1동 2243
제주시 도련동 고광휴씨 집에서 자라고 있는 산귤나무 중 하나로 나이는 250년 정도로 추정된다. 산귤은 가지가 조밀하게 나며, 가지의 마디가 짧다. 열매는 편구형으로 껍질에 얕은 돌기가 돋아 있다. 열매의 무게는 25∼35g 정도로 적은 측에 속한다. 제주말로는 ‘산물’이라고 한다.


제주도에서 감귤을 재배하기 시작한 것이 언제인지 단정할 수는 없으나, 감귤에 관한 문헌상의 기록으로 1052년(고려 문종 6)에 ‘세공귤자를 100포로 정한다’고 하였으니, 이미 11세기부터 제주도에서 감귤을 진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이전부터 감귤이 재배되었을 것이므로 제주 감귤의 재배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의 중앙 집권력이 강화되면서 지방의 수취 체제도 강화되었다. 수취 제도 중 진상 제도는 고려 초 이래로 행해졌던 것으로 조선시대에는 더욱 정비되었다. 제주도의 진상물 중 과실의 진헌을 위하여 1526년(중종 21)에 이수동 제주목사는 5개의 방호소에 과원(果園)을 설치하였고, 이후 1530년(중종 25)에는 과원이 30개소에 달하였다. 이는 기존에 파악되지 않았던 과원의 수에 이수동 제주목사의 과원 설치 이후 파악된 수이다.

17세기 중반에는 과원이 37개소에 이르며 각 과원의 위치 및 설명이 나타난다. 18세기 전반에는 과원이 42개소로 증가하고, 19세기 중반에는 54개소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과원의 증설은 중앙에서 요구하는 감귤의 진상 액수를 충당하기 위한 방책이었을 것이다. 17세기에서 19세기까지 감귤의 진상은 감귤의 익는 정도에 따라 9월에서 이듬해 2월까지 이루어졌다. 9월에 제일 먼저 유자가 봉진되고 10월에 감자와 동정귤을 시작으로 늦게는 산귤이 봉진되었다. 『남환박물』의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청귤은 2월이 되어야 맛이 좋아 2월에 진상하였다. 감귤은 생과 외에 약재로도 중요하여 12월에 세초 진상이라 하여 진피·청피·귤핵 등이 꾸준히 바쳐졌다. 18세기에 접어들어 감귤 진상 액수가 줄어들었다. 1801년 공노비의 해방으로 과직을 구하기 힘들어져 공과원(公果園)의 감귤 생산 액수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이를 보충하기 위해 사과원(私果園)의 감귤 징수를 늘리게 되자, 부담이 가중된 농가에서 감귤 재배를 기피하게 되어 차차 감귤 생산이 줄어들고 진상 액수도 줄어들게 되었다.

일부 감귤의 생산이 특히 저조하여 19세기 중반에는 특정 감귤류에 대해서 대봉(代奉)이 이루어졌다.

금귤을 대신하여 당금귤과 유감으로 봉진하였고, 등자귤 대신에 동정귤, 산귤 대신에 감자를 봉진하였다. 그러나 『제주계록』에는 대봉에 대해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동정귤 대신에 등자귤을, 유감 대신에 금귤을 진상하였고, 후에는 금귤과 등자귤의 생산도 많지 않아 모두 산귤로 대봉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감귤이 진상되면 임금은 감귤을 성균관 유생들에게 나누어 주고 과거 시험의 일종인 황감제(黃柑製)를 실시하였다. 조선 후기 과거 시험이 많아져 급제자가 증가하여 폐단이 생겼을 때, 다른 과거 시험들은 줄였으나 황감제만큼은 계속 시행했을 만큼 감귤 진상은 의미가 컸다. (디지털제주문화대전)


조선 시대 조정에서는 제주 감귤이 종묘 천신용, 빈객 접대 등 궁중에서 가치가 높아 주요한 진상품으로 재배하도록 했다. 이러한 감귤류 나무를 재배하던 장소가 과원이었다. 조선 시대에 본격적으로 제주 과원의 조성되기 시작된 것은 1526년(중종 21) 제주목사가 감귤을 진상하기 위해 5방호소[서귀(西歸)·별방(別方)·수산(水山)·동해(東海)·명월(明月)]에 과원을 설치하고 감귤을 옮겨 심은 뒤 군사로 하여금 지키게 한 것에서 비롯된다.


[제주 감귤]
1. 감귤의 종류
이원진(李元鎭)이 지은 『탐라지(耽羅志)』 과원조를 보면, 제주 3읍의 과원에는 감자·금귤·당금귤·당유자·동정귤·등자·산귤·석금귤·유감·유자·지각·청귤 총 12종의 감귤이 식재되었다. 제주목에는 전체 12종의 감귤 중 금귤을 제외한 11종, 정의현에는 금귤·당유자·산귤·유감·유자·청귤 6종이, 대정현에는 당유자·동정귤·산귤·석금귤·유감·유자·지각·청귤 8종이 식재되어 있었다. 충암 김정(金淨)의 『제주풍토기(濟州風土記)』[1521]에 의하면, 금귤이 9월에 가장 먼저 익고, 유감과 동정귤은 10월 그믐 때 익는다고 하였다. 금귤·유감·동정귤을 맛이 좋은 품종으로 여겨지고 있었으나, 김정은 청귤을 최고의 상품으로 치고 있으며, 왜귤(倭橘)을 가장 하질로 보았다. 백호 임제(林悌)의 『남명소승(南溟小乘)』에도 유자·당유자·유감 등 9종류 귤에 대해 각각의 특징이 설명되어 있다. 조선 후기 순조 때 제주목사를 지냈던 영헌 조정철(趙貞喆)은 『정헌영해처감록(靜軒瀛海處坎錄)』[1824] ‘귤유품제(橘柚品題)’에서 감귤이 특징을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2. 감귤 진상의 규모와 특징
17세기에서 19세기까지 감귤 진상은 감귤의 익는 정도에 따라 9월부터 2월까지 이루어졌으며, 9월에 제일 먼저 유자가 봉진되고 10월에 감자와 동정귤을 시작으로 늦게는 산귤이 봉진되었다. 17세기 전반 김상헌(金尙憲)의 『남사록(南柶錄)』[1601년]에 의하면, 8종의 감귤이 진상되었다. 가장 많이 진상된 감자는 3만 1525개로 전체 감귤 진상액의 60%를 차지한다. 그 다음으로는 동정귤 6,490개, 유감 4,290개가 각각 감자·동정귤·유감 3종류의 감귤이 전체 진상액의 81.8%를 차지한다. 당유자는 결실수에 따라 봉진하였다. 감귤은 생과 이외에도 약재로서도 중요하여 12월에 세초진상이라 하여 진피·청피·귤핵 등 17세기부터 꾸준히 바쳐졌다. 18세기 접어들면 공노비의 해방으로 과직을 구하기 힘들어지면서 감귤 생산 액수가 줄어들게 됨에 따라 진상 액수가 줄어든다. 19세기 『제주계록』에서는 동정귤 대신에 등자귤을, 유감 대신에 금귤을 진상하였고, 후에는 금귤과 등자귤의 생산도 많지 않아 모두 산귤로 대봉되었다. 매년 2월에는 청귤이 천신용과 물선 진상용으로 봉진되었다. 『탐라순력도』에는 감귤 봉진(柑橘封進)이라 하여 망경루(望京樓) 앞뜰에서 귤을 상자에 넣어 봉(封)하는 과정 등이 상세히 그려져 있는데, 당시 봉진한 수량은 다음과 같다. 당금귤(唐金橘) 678개, 감자(柑子) 25,842개, 금귤(金橘) 900개, 유감(乳柑) 2,644개, 동정귤(洞庭橘) 2,804개, 산귤(山橘) 828개, 청귤(靑橘) 876개, 유자(柚子) 1,460개, 당유자(唐柚子) 4,010개, 치자(梔子) 112근, 진피(陳皮) 48근, 청피(靑皮) 30근 등이다.


[제주 과원]
1. 변천
과원은 중앙의 수요를 충당하기 위하여 16세기 이후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18세기에 접어들면 42개 소에 달하고 19세기에는 54개 소에 이르게 된다. 제주목 내 과원은 초기에 23개 소였던 것이 1842년에는 43개 소로 증가했다. 19세기에는 18세기 존재했던 과원들 중 17개 과원이 폐원되었고, 31개 과원이 새로 설치되었다. 제주목 지역에서 과원의 설치와 폐원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반면 정의현과 대정현에서는 신설되는 과원과 폐원되는 과원의 수가 비슷해 과원의 전체 수에는 큰 변동이 없다. 제주 과원의 증가는 감귤 진상 액수를 충당하고 과실의 진상을 위해 과원을 늘려 나갔기 때문이었다. 증가 추세를 보이던 제주 과원은 조선 말기에 이르러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이것은 감귤 재배가 농사의 수입 증대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조정에 진상 또는 세공하는 데 1차적으로 목표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과다한 진상과 감귤 재배 독려를 피하기 위해 감귤나무를 비밀리에 고사시키거나 생산을 의도적으로 기피하는 현상에 기인한 것이다.


2. 특징
조선 시대 제주 감귤은 『경국대전』과 『속대전』에 언급할 정도로 중앙 조정에서 상당한 관심을 가지기까지 했다. 『경국대전』 공전(工典) 재식조(裁植條)에는 감귤나무와 유자나무 증식을 위해 접붙이고, 돌보고 지키는 이를 따로 두기도 하였으며, 감귤나무와 유자나무의 수는 세초(歲初)에 그 숫자를 자세히 적어 임금에게 보고하도록 했다. 또 『속대전』에는 감귤에 관한 수상제도와 희귀감귤의 재배에 따른 상벌을 논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17세기 제주 과원은 제주목 23개소, 정의현 8개소, 대정현 6개소로 분포되어 있으며, 과원이 제주목에 치중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제주 과원에 식재된 감귤의 종류를 파악해 보면 감자나무는 제주목에서만 재배가 되고 있었으며, 제주목에는 전체 12종의 감귤 중 금귤을 제외한 11종의 감귤이 모두 식재되어 있다. 제주목에서 재배되는 감귤나무 수는 1,873그루로 전체 감귤나무 2,541그루 중에 73.7%에 해당한다.

제주 과원의 감귤이 얼마나 귀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 중의 하나는 '황감제(黃柑製)'라는 과거시험이다. 황감제는 1641년(인조 19)에 처음 시작된 과거로 성균관과 사학에서 공부하는 유생들을 대상으로 매년 12월에 제주 목사가 감귤과 유자 등을 진상하면 기념으로 시험을 보았고, 일반 과거처럼 33인을 뽑는 것이 아니라 단 1명만을 뽑았고 몇 차례에 걸쳐 시험을 보는 것과 달리 단 1차례에 뽑아 바로 관직을 주었기 때문에 인기가 높았다.


[서귀포시와 과원]
오늘날 서귀포시는 조선 시대 정의현과 대정현에 소속되었다. 『탐라지』에 의하면, 대정현에는 고둔·법화·동천·병악·별과원·암림 6개 소, 정의현에는 정자·독학·별과원·우전·금물·향목·원통·성산 8개 소가 있었다고 기록되고 있다.

조선 시대 대정현 소속하에 있었던 고둔은 염둔 과원으로도 불리며, 조선 시대 고득종의 별장터가 있었던 오늘날 서귀포시 강정동 2012 지대, 법화는 서귀포시 하원동 법화사 서쪽 편, 동천은 서귀포시 안덕면 감산리 골물동, 병악은 서귀포시 안덕면 서광리 거린오름, 별과원은 서귀포시 대정읍 대정현성 내, 서귀포시 안덕면 덕수리 동동네와 화순리 섯동네 사이 일대를 가리킨다.

조선 시대 정의현 소속하에 있었던 금물은 현재 서귀포시 남원읍 하례리 1570번지, 원통은 서귀포시 호근동 850-7번지, 정자는 정의현 동쪽 30리로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2리, 독학은 정의현 동쪽 25리로 서귀포시 성산읍 난산리 서북쪽, 별과원은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 정의현청 동헌이 있었던 동북쪽, 우전은 정의현 서쪽 호촌으로 현재 서귀포시 남원읍 신례리, 향목은 정의현 서쪽 65리로 서귀포시 보목동, 성산은 정의현 동쪽 25리로 현 서귀포시 성산읍 고성리를 가리킨다.


[의의와 평가]
제주도의 대표적 특산품 중 하나가 감귤이다. 조선 시대 국가가 관리했던 과원 터는 제주가 귤의 고장으로서 역사적 연원을 찾아 볼 수 있는 가치가 있는 유적이다. 조선 시대 과원의 설치 및 변천을 통해 감귤을 포함한 과실의 재배 현황 및 진상 액수를 파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당시 주민의 경제생활을 엿 볼 수 있다.

최근 조선 시대 제주 감귤을 재배했던 '금물과원(禁物果園)'이 복원·정비되었다. 앞으로 역사적 가치가 있는 과원 터의 위치를 비정한 다음 복원해 제주도의 역사와 화, 생태 관광 자원으로서 활용할 필요가 있다.


진상품관련근거
산귤은 제주도(제주목)에서 왕대비전, 혜경궁, 중궁전, 세자궁, 대전에 진상하였다는 기록이 여지도서, 춘관통고, 공선정례에 기록되어있다.

[귤 진상]
1. 귤 재배와 진상
조선시대 제주에는 귤의 진상을 위하여 곳곳에 과수원을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경국대전』의 규정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제주·정의·대정 삼읍에서는 매년 귤나무를 새로 심거나 접붙이기를 하여 인근 주민들로 하여금 재배하도록 하였는데, 매 12월에는 새로 심거나 접붙이기를 한 수량을 왕에게 보고하도록 하였다.

본격적인 과수원의 조성은 1526년(중종 21) 이수동 목사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 후 기존의 과원들을 관아 소속의 과원으로 계속 설치하여 나갔고, 1530년(중종 25)경에는 과원의 수가 제주목 19곳, 정의현 5곳, 대정현 6곳으로 모두 30곳에 이르렀다.

그 후 제주목에 3곳, 정의현에 2곳이 증치되어 1653년(효종 4)에는 모두 35곳에 과원이 운영되었다. 그리고 이형상 제주목사 당시에는 과원의 수가 42곳으로 증가하였다.

과원에는 모두 돌담을 쌓고 방풍과 주민들이 훔쳐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돌담 주위에 방풍림을 심었으며, 나아가 군인에서 점차 과수원을 지키는 소위 과직(果直)을 두어 과수원을 운영해나갔다.

그러나 과직들의 고통은 매우 심하여서 제주도민들은 과직으로 차출되는 것을 매우 기피하였다. 왜냐하면 감귤이 열매를 맺어 어느 정도 크기 시작하면, 관아에서는 장부를 들고 와서 일일이 귤나무마다 열매의 수를 장부에 기록하였다가 원래의 숫자대로 귤을 징수하였다.

관아 소속의 과원만으로는 조정에서 요구하는 귤을 마련할 수가 없었다. 이에 관아에서는 각 집마다 귤나무 여덟 그루를 재배하여 그 열매를 관아에 상납하면, 한 사람의 1년 역(役)을 면제해주는 방안을 마련하였다.

과거 제주도의 집 울타리에 귤나무가 한두 그루씩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관아에서 귤이 익기도 전에 장부를 가지고 와서 일일이 열매에다가 방점을 찍어서 그 수를 헤아려서 나중에 징수해갔기 때문에 도민들은 자연적으로 떨어져버린 귤의 수까지 부당하게 책임을 져야했다. 이러한 이유로 도민들은 귤나무가 오히려 ‘고통을 주는 나무’라 하여, 몰래 귤나무에 더운물을 끼얹어서 고사시켜버리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귤은 제사용 혹은 외국이나 국내 손님 접대용으로 주로 조정에서 이용하였다. 대체적으로 귤의 진상은 가장 일찍 익는 당금귤·금귤에서부터 시작하여 매 10일 간격으로 20차례 조정에 진상하였다.

진상 시기가 되면 제주목 관아의 동헌(東軒)에서 진상용 귤을 담기 위한 상자를 마련하고, 상자에 귤을 담아 봉하여 진상하였다. 이러한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한편에서는 제주목사 등 관리들은 기생들을 불러 모아놓고 거문고를 타면서 풍악을 즐겼다.

귤을 일일이 따지 않고 가지에 붙어 있는 채로 귤을 진상하기도 하였다. 또한 저장할 수 있는 귤은 저장해두었다가 4~5월에 진상하기도 하였다. 관아에서는 귤나무의 번식을 위하여 씨를 받아서 심거나, 혹은 접을 붙여 그 수를 확대해나갔다. 숙종은 직접 당금귤의 종자를 제주에 내려 재배하도록 지시하기도 하였다.


2. 귤 진상의 폐단
귤의 진상과 관련하여 많은 폐단이 발생하였다. 진상 기일이 너무 오래 소요되어 진상용 귤을 운반하는 도중에 귤이 썩어버리는 경우가 많아졌고, 이 경우에 진상 관리들이 문책을 당하였다.

물론 진상용 귤을 실어온 수고에 보답하는 의미에서 조정에서 옷과 쌀을 하사한 경우도 없지는 않았다. 또한 진상용 귤을 운반하다가 태풍을 만나 표류하는 경우도 많았다.

한편, 선조 때부터는 제주에서 그 해의 첫 귤을 진상하면 성균관 유생들에게 감귤을 나누어주면서 과거를 실시하는 것이 하나의 관례로 정착되기도 하였다. 이를 감제(柑製) 혹은 황감제(黃柑製)라 하였는데, 수석으로 급제한 자에게는 전시에 바로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으며, 차점자 등에게는 향시나 한성시에 30%의 가산점을 주거나 상을 하사하였다.

귤관련 봉진
순 력 일 : 1702년(숙종 28)
순력내용 : 여러 종류의 감귤과 한약재로 사용되는 귤껍질을 봉진
귤 진상은 9월부터 시작하여 다음해 2월까지 10일 간격으로 1운(澐)에서 20운까지 20회나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는 천신(薦新:제사 등에 쓰이는 물품) 2차, 진상 21운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20운의 원칙이 그대로 지켜지지는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진상할 귤을 마련하기 위해 1526년(중종 21)에 이수동(李壽童) 목사는 별방·수산·서귀·동해·명월등 5개 방호소에 과원(果園)을 설치하고, 그곳을 수비하는 군인으로 하여금 관리하도록 하였다. 그후 과원은 제주목에 22개소, 정의현에 7개소, 대정현에 6개소로 증설되었으며, 숙종 때에는 모두 42곳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들 과원에서 생산되는 양으로써 봉진의 수량을 충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에 관(官)에서는 일반 민가에 있는 귤나무를 일일이 조사하여 관리하였다. 일반 백성들에게는 귤나무 8주(株)를 기준으로 하여 1년에 역(役)을 면제하여 주는 방안이 마련되기도 하였지만, 귤의 열매가 맺자마자 관가(官家)에서 일일이 그 맺은 숫자를 헤아리고 장부에 기록하였다가 그 수를 귤나무 소유자에게 모두 부과시켰기 때문에 많은 문제가 파생되었다. 즉, 수확시기까지는 많은 시일이 남아 있어 그간에 해충 또는 바람 등에 의해 떨어진 귤마저 그 소유자에게 전가시켰던 것이다. 이에 민가에서는 오히려 귤나무가 고통을 주는 나무라 하여 도리어 귤나무에 더운물을 끼얹어 고사(枯死)시키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이 그림은 연희각(延曦閣)과 망경루(望京樓) 앞뜰에서 귤을 상자에 넣어 봉(封)하는 과정 등이 상세히 그려져 있는데, 부기(附記)의 내용은 아래표와 같다. 한편, 제주의 귤이 조정에 도착하면 임금은 성균과 유생들에게 그 일부를 나누어주면서 시험을 보았는데, 이것이 이른바 황감제(黃監制)라는 과거시험이다. 


라틴명; Aurantii Pericarpium
약재의 효능
이기(理氣);  (행기해울(行氣解鬱), 강기조중(降氣調中), 보중익기(補中益氣)하여 기체(氣滯), 기허(氣虛), 기역(氣逆)등을 치료하는 것을 가리키는 용어임.) 
조중(調中);  (중초(中焦)를 조화롭게 하는 효능임) 
개위(開胃);  (위(胃)를 열어주는 효능임) 
쾌격(快膈);  (흉격의 기운을 시원하게 소통시키는 효능임) 
정구(定嘔);  (구토(嘔吐)를 그치게 하는 효능임) 
지해(止咳);  (기침을 그치게 하는 효능임) 
조습(燥濕) ; (고조(苦燥)한 약물로 습사(濕邪)를 제거하는 방법으로 중초습증(中焦濕證)에 적용.) 
소담(消痰);  (막혀 있는 탁한 담(痰)을 쳐 내리는 거담(祛痰) 방법임.) 
도체(導滯);  (체한 것을 내려가게 하는 방법을 가리키는 용어임.) 
지사(止瀉);  (설사(泄瀉)를 치료하는 효능임) 
산결(散結) ; (맺힌 것을 푸는 효능임) 
지애(止呃);  (딸꾹질을 그치게 하는 효능임) 
통림(通淋);  (하초(下焦)의 습열(濕熱)을 없애고 결석(結石)을 제거하며, 소변 볼 때 깔깔하면서 아프거나 방울방울 떨어지면서 시원하게 나가지 않는 병증을 제거하는 방법임) 
이수곡(利水穀);  (비위(脾胃)의 기능을 좋게 하는 효능임) 
이기조습(理氣燥濕);  (기(氣)를 통하게 하고 습한 것을 마르게 하는 효능임) 
하기(下氣);  (인체 하부의 기(氣)를 말함.) 
통신(通神);  (신기(神氣)를 소통시키는 효능임) 
작용부위; 비(脾) , 폐(肺) 
성미; 고신(苦辛) , 온(溫) 
독성; Mild; active, but toxicity appears very mild unless used for long time 1,2).
 1) H.K. Do, Shin Rhong Bon Cho Kyung, 452.
 2) H.T. Rhu, Hyang Yak Jip Sung Bang, 1431.
약재사용처방; 붕사산(硼砂散)[1] /  석림(石淋) 

참고문헌
춘관통고, 공선정례, 익생의 자연건강 컨텐츠, 디지털제주문화대전, 제주도정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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