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래
가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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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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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태
감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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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활
강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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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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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리
고슴도치
고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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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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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용
녹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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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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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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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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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게
대구
대나무
대발
대추
더덕
더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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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
도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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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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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기름
동충하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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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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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기름
마늘
마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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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생이
매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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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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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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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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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조어
백하수오
백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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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루
병어
법주
보골지
보리
복령
복분자
복숭아
복어
부들
부자
부채
부추
붉나무
붕어
비빔밥
비자
뽕나무
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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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나물
산삼
삼림욕
산수유
살구
삼릉
삼배
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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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결명
석곡
석류
석영
석이버섯
석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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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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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이버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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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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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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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육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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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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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자
오곡
오골계
오정주
오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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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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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황
울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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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
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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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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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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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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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라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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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게
참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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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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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어과메기, 청어의효능, 과메기의 원조는 꽁치가아닌 청어입니다
 

 
청어(靑魚)는 청어과 청어속(靑魚屬, Clupea)에 속하는 어류의 총칭이다. 기름기가 많은 작은 생선군이며, 북대서양, 발트 해, 북태평양, 지중해의 온대류의 얕은 바다에서 발견된다. 청어에는 15가지 종의 생선이 있으며, 가장 많은 종이 북대서양 청어(Clupea harengus)이다. 대한민국 해역을 포함하는 태평양에 서식하는 청어는 Clupea pallasii이다. 청어는 대규모 집단으로 움직이며, 봄에 유럽과 아메리카 해안에 올라오며, 어획되어 소금에 대량으로 절이거나 훈제한다. 몸길이는 35㎝로, 일명 바다의 밀. 잡아도 잡아도 끝이없는 엄청난 포획량으로 근대이전까지 인류의 주된 식량원 중 하나였다. 외견이 정어리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슷하나 몸 측면에 방사형 융기선이 없는 점, 꼬리에 정어리 특유의 비늘이 없는 점, 옆구리에 검은 점이 없는 점 등으로 구별된다. 몸빛깔은 담흑색에 푸른색을 띠고 있으나 배 쪽은 은백색이다. 대표적인 한해성 어류로, 3월 하순부터 수온이 4∼5℃ 가까이 올라가면 성숙한 성어는 깊은 바다에서 연안의 해조류가 무성하고 암초가 있는 얕은 연안이나 내만으로 떼를 지어 몰려오고, 그 곳에서 12월부터 이듬해 4월 사이에 산란한다. 먹이는 플랑크톤성 갑각류이다. 과거 한국 바다 연안 전역에서 매우 많이 잡혀 비유어(肥儒魚/선비를 살찌우는 물고기)[3]로 불릴 정도로 값싸고 친숙하며 맛있는 생선이었다.

진상품관련근거
경상도(거제, 경주, 고성, 기장현, 김해, 남해현, 동래현(부산), 영덕현, 영일현(포항), 울산, 웅천, 장기현, 진해현, 창원, 청하현, 칠원, 통영, 흥해군) 전라도(만경현, 부안현, 흥덕현) 충청도(결성현, 남포현, 보령현, 비인현(서천군), 서산군, 서천군, 임천군, 태안군, 홍주목) 평안도(선천군) 함경도(감영, 경원도호부, 경흥도호부, 덕원도호부, 문천군, 부령도호부, 북청도호부, 안변도호부, 영흥, 이성현, 정평도호부, 종성도호부, 함흥, 홍원현, 회령도호부) 황해도(감영, 康翎, 강령현, 옹진, 장연현, 풍천도호부, 해주목)에서 대전, 왕대비전, 혜경궁, 중궁전, 세자궁에 진상하였다는 기록이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춘관통고, 공선정례에 기록되어있다.

생활민속적 관련사항
청어는 냉수성 어류인데 옛날에는 우리 나라 전연안에서 어획되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토산조(土産條)를 보면 전도의 연안에서 어획되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청어는 일찍부터 산업적 가치가 높은 물고기로서 도처에서 어획되고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영일현(迎日縣) 산천조의 주진(注津)에 관한 기록을 보면 “세간에 전하는 말에 의하면 매년 겨울에 청어가 반드시 먼저 여기에서 산출되는데 진헌(進獻)한 뒤에 제읍(諸邑)에서 이를 잡기 시작하며 그 산출의 다소에 의하여 다음해의 농사의 풍흉을 점친다.”고 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에는 이순신 휘하의 수군이 청어를 많이 잡았다. 일례로서 ≪난중일기≫에 의하면 1595년(선조 28) 12월 4일의 일기에 “순천 2선(船) 낙안 1선을 군사 점검하고……황득중(黃得中)·오수(吳水) 등이 청어 7천여 급(級)을 싣고 오므로 김희방(金希邦)의 곡식 사러 가는 배에 세어 주었다.”는 구절이 있다. 청어를 잡아 군량미와 바꾸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광해군 때에 허균(許筠)이 지은 ≪성소부부고 惺所覆瓿藁≫에 의하면 “청어는 4종이 있다. 북도산(北道産)은 크고 속이 희다. 경상도산은 껍질은 검고 속은 붉다. 전라도산은 조금 작으며 해주에서 잡은 것은 2월에 맛이 극히 좋다.”고 하여 산지에 따라 청어가 상이한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익(李瀷)의 ≪성호사설≫, 徐有榘의 ≪난호어목지 蘭湖漁牧志≫, 정약전(丁若銓)의 ≪자산어보 玆山魚譜≫ 등에는 청어의 회유로(洄游路)를 설명하고 있다.
당시 청어의 회유에 관한 것까지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은 주목할만한 일이나 그 신빙성은 크지 않다. 서해산 청어와 동해산 청어는 각각 종족을 달리하는 독립적인 계통군에 속하는 것이었던 것 같다.
과거 황해방면의 청어는 독립적인 상태에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였으며, 동해의 청어와 황해의 청어가 교류되는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수온이 특히 낮은 해의 겨울에 전라남도 연안을 통하여 동해의 청어가 황해에 침입하는 데 그치는 것이라고 보았다.

남해안산 청어의 서한(西限)은 경상남도 사천만 근처까지이다. 정약전은 ≪자산어보≫에서 흑산도 사람 장창대(張昌大)의 말을 인용하여 영남산은 척추골이 74개이고 호남산은 53개라고 하였다.
척추골 수가 이와 같이 차이가 컸다면 서해산 청어는 동해산 청어와 같은 계통군인 영남산 청어와는 상이한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장창대의 말은 믿기 어려운 데가 있고 척골 수의 계산에 있어서도 어떻게 계산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일제시대에 한 전문가가 동해산 청어의 척추골 수를 조사한 일이 있는데 그 결과를 보면 평균 53.85개로 되어 있다. 그리고 1976년 11월 25일에 흑산도 근해에서 잡힌 청어의 척추골 수를 조사한 것을 보면 그것은 52개였다. 후자는 장창대가 말한 것과 거의 같은 수인 것이 흥미롭다.
청어는 역사적으로 볼 때 세계 여러 곳에서 심한 자원변동을 보였는데 우리 나라 연해에 있어서의 청어도 그 자원이 다른 어류자원과는 달리 아주 심한 단기적 또는 장기적인 변동현상을 보였다.
조선시대의 각종 문헌에는 청어자원변동에 관한 것이 종종 언급되어 있다. ≪중종실록≫ 6년 4월 정해조에는 서해안의 위도에는 예전부터 청어가 다산하던 곳이나 1506년(중종 1) 이후부터는 청어가 잡히지 않는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에는 봄철에 서남해에서 항상 다산하던 청어가 1570년(선조 3) 이후부터 전혀 산출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유성룡(柳成龍)의 ≪징비록≫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에 발생하였던 기이한 일들을 전하는 가운데, “동해의 물고기가 서해에서 나고 점차 한강까지 이르렀으며, 원래 해주에서 나던 청어가 근 10여년 동안이나 전혀 나지 않고 요해(遼海)에 이동하여 나니 요동사람이 이를 신어(新魚)라고 일컬었다.”고 하고 있다.
그 이후에도 우리 나라 연안 각처에서 잡히기는 하였으나 자원의 성쇠소장은 심하였다. 많이 잡힐 때에는 최다어획류의 하나로 손꼽혔다.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의하면 “우리 나라에서는 100여년 전에 심히 성하였다가 중간에 절산(絶産)되었는데, 1798∼1799(정조 22∼23)년에 다시 나타나 조금 흔하여졌다.”고 하였다.

같은 책에는 또 “대체로 해주에서 나는 것이 국중(國中)에 넘친다. 기미년(1799) 이후부터 20미를 엮어서 1급으로 하여 동전 2, 3문과 바꾸었다. 순조 때의 경인·신묘년(1830∼1831)간에는 1급의 가격이 40∼50문이었고 점차 등귀하였다. 헌종 때 을미년(1835) 이후에는 다시 점차 흔하여졌으나 기미년 이후만은 못하였다.”고 하여 청어자원의 변동과 이에 따른 가격 등락을 비교적 잘 설명하고 있다.
19세기 후반기에 접어들어 서해안의 청어자원은 곳곳에서 줄어들기 시작하여 19세기 말에 이르러 서해안에서는 거의 잡히지 않게 되었다. 20세기로 넘어오면서부터 청어어장은 경상도의 동북연안으로 국한되었다. 일제시대에도 청어자원은 변동이 심하여 어장의 동점북천(東漸北遷)현상을 보였다. 그리하여 1910년대 초에는 부산·울산 등지에서도 청어가 잡히지 않게 되었다.
이때부터는 산업적으로 청어어업이 성립될 수 있는 어장은 영일만 이북의 동해안으로 좁혀지고 말았다. 그러나 어획량은 어구·어법의 발달, 어업자수의 증가 등에 힘입어 증가추세를 보여 1911년에 약 3,000M/T에 불과하던 것이 1935년에는 약 5만M/T에 달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는 감소추세를 보이다가 광복 직전에는 격감하여 사실상 청어어업은 중단되다시피 되었다.
1970년대에 이르러 비로소 서해안에서 기선저인망과 기선건착망에 상당히 많이 잡히기 시작하여 1971년에는 근 7,000M/T이 잡혀 청어자원 회복의 꿈을 안겨주었으나 그 이후 다시 감소되어 근래에는 겨우 수백M/T이 어획되고 있을 뿐이다. 1970년대에 잡힌 청어는 황해의 저층 냉수에 군집하여 있는 것이었고 연안에 내유한 것이 아니었다.

청어어구는 조선시대에는 세망(細網)이라는 명주실로 만든 자망이 많이 사용되었고 서해안에서는 어전(漁箭)이나 중선망(中船網)·주목망(柱木網) 등으로 잡았다. 남해안에서는 정치망으로도 잡았고 동해안에서는 지인망이 사용되기도 하였다. 일제시대에는 자망과 정치망이 많이 사용되었다.
청어는 일찍부터 관목(貫目)이라는 건제품으로 가공되어 많이 소비되었다. 또 주목되는 것으로서 조선시대에 이미 연관목(烟貫目)이라고 하는 청어훈제품이 제조되고 있었다. 청어자원이 감소된 원인은 남획에 의해서라기보다 수온변화 등의 자연적 조건의 변화에 기인한다고 본다.
과거 서해안 연안에 많이 내유하였던 것은 황해 냉수괴의 세력이 연안까지 미쳤음을 의미한다. 이는 해양물리학적 측면에서도 연구가치가 있다고 본다. 변동이 심한 청어자원이 다시 또 풍부해질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청어는 가히 조선에서 가장 인기있는 등푸른 생선이었는데 고등어의 이름이 등이 높은(高登) 물고기가 된 이유도 청어에 비하면 체고가 높기 때문이다. 즉 우리 조상들에게 등푸른 생선의 표준은 어디까지나 청어였던 것이다.
성질이 평(平)하고 맛이 달며[甘] 독이 없다. 습비(濕痺)로 다리가 약해지는 데 쓴다[본초].
○ 강이나 호수에 있는데 잉어나 혼어(뗬魚) 비슷하고 등은 퍼렇다[본초].
○ 이것은 우리나라의 청어가 아니다[속방].
청어의부작용은 과다섭취하면 체내에 축적된 생선의 기름이 산패되어 세포의 노화와 파괴를 가져오는 과산화지질이 되기 쉽기 때문에 적당히 먹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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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어의효능
1.청어는 전체의 20%가 필수 지방산으로 구성되어 있는, 중요한 노화방지 생선입니다
2.비타민B군, 비타민A, 비타민D, 비타민E, 오메가3 필수 지방산, 단백질 등이 풍부한 건강식품입니다
3.뇌세포를 활성화시켜주는 DHA 및 학습과 기억능력을 개선시키는 두뇌에 좋은 음식이다.
4.오메가-3 지방산 함량이 높은 청어는 항염 효과가 뛰어나 관절염을 예방하고 완화해 주며,
5.심혈관계질환 위험률을 낮춰 주고 기억력을 강화해 준다고 합니다
6.청어는 아연 함량도 높아서 면역력 증강에 효과가 좋으며, 청어에는 단백질도 풍부하지만 다량의 비타민도 함유하고 있습니다
7.소화흡수를 돕는 양질의 단백질이 풍부한다.
8.필수아미노산을 함유하고있어 한국인에게 좋다.
9.등푸른생선인 청어를 섭취하면 동맥경화와 심장병의 원인인 혈전증예방에 좋다.
10.풍부한 티로신이 뇌에서 신경전달물질을 증가시켜 정신적에너지를 활성화시킨다.
11.청어의 지방과 단백질이 편두통과 고혈압초기의 신장병을 치료하며 기관지천식증상을 완화시킨다.

역사
예로부터 청어죽은 보신재로 산후나 병후의 회복기에 좋은 식품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값도 싼 생선이라 어떤 선비는 '1냥에 청어 3뭇밖에 안 되는데 너무 비싸진 거 아니냐?'라고 하기도 했다. 참고로 1뭇은 10마리 1냥의 가치는 어느 시대를 중심으로, 뭘 기준으로 하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 현대 기준으로는 2만원 정도. 그러나 동시에 어획량 변화가 걷잡을 수 없이 큰 어종이기도 하다. 19세기 말까지는 어획량이 엄청나, 부산항에 배가 들어갈 수 없을 만큼 청어가 몰려들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런데 60년대부터 차차 줄어들어 7~80년대에는 1/100수준이 되었다. 70년대 중반에는 원래 제철이어야 하는 연초 때의 어획량이 아예 0이었다는 기록도 있었으나, 90년대들어 차차 늘고 있다. 서애 류성룡의 징비록에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수십 년간 청어가 거의 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막상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충무공 이순신은 병사들을 동원해 청어잡이에 열중해 수천 마리의 청어들을 잡아 군사와 피난민들의 식량으로 썼다고 한다. 한산도에 둔전을 일구기는 했지만, 거기에서 나오는 곡식만 가지고는 그 많은 입을 먹여 살리기에 부족했기 때문이다. 잡은 청어들은 주로 그냥 먹기보다는 말려서 먹었다. 청어의 내장에는 지방이 많아서 금방 상해버렸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청어 회유로가 40년이 지날 때마다 바뀐다는 설이 있으므로, 다시 연근해가 청어 떼로 넘칠 날이 올 지도 모를 일이다. 실제로 세계사를 통틀어보아도 청어어획량은 늘 들쑥날쑥해서 청어가 잡히는 지역의 경제를 좌지우지하곤 했다. 대항해시대 시절 네덜란드도 청어어획고의 변화로 국가경제가 휘청거린 케이스이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몰락 이후 네덜란드가 유럽의 패권을 거머줬을 때 그 밑바탕이 된 것이 사실 엄청난 청어 어획고로 벌어들인 돈이었다고. 하지만 청어 어획고가 급속히 떨어지면서 결국 유럽의 패권은 프랑스와 영국으로 그리고 일설에 의하면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기 훨씬 전에 북유럽, 서유럽 어부들이 이 청어를 찾기 위해 북해와 북대서양을 거쳐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해 정착했다는 믿거나 말거나 하는 썰도 있다 카더라.
하여튼 일단 잡힐때는 엄청난 숫자가 잡혀서 저 멀리 북태평양에서는 청소기로 빨아들여 잡으며 알래스카 근처의 한 청어 산란지는 산란철이 되면 청어의 정액 때문에 물 색깔이 희뿌옇게 변할 정도이다.

음식
가공해서 훈제 청어나 수르스트뢰밍으로 만들 수 있다. 둘 다 냄새가 강렬하다. 구워서 먹을때 폭풍같은 가시의 향연이 압박적인데, 척추 부근의 큰 뼈를 들어 내면서 한번만 발라주면 다 씹어먹을 수 있는 가느다란 가시라 먹기도 쉽고 담백하면서도 색다른 맛이 일품이다.
한국에서는 소금구이로 먹거나 고등어처럼 무를 넣고 조려 먹기도 한다. 회로도 먹는데, 썰어두면 살이 불그스름하고 맛이 다른 생선에 비해 담백한 것이, 회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번 맛을 보면 잊을 수가 없을 별미이다. 버틸수가 없다. 그리고 과매기도 원래는 청어로 만드는 것이었다. 다만 청어 어획량이 줄면서 꽁치로 대체된 것이 지금은 주객이 전도되어 과매기 하면 꽁치를 연상하고 청어는 따로이 청어 과매기라고 부르는 현실. 90년대까지만 해도 구룡포의 과매기 상인들은 청어 과매기가 진짜라고 입을 모아 말했었다. 하지만 꽁치 과매기처럼 지속적으로 일정량을 공급할 수가 없어서 거의 잊혀졌다가 최근 다시 만들어지는 것 같다. 청어알도 별미다. 보통 염장어란 하면 숭어알이나 민어알을 연상하지만 사실 청어알도 염장하면 아주 맛있다. 특히 알 껍질이 아주 단단하면서도 오독거리는 식감을 내는데 그 풍미가 매우 특이하다. 과거에 청어가 흔할때에는 청어알젓이 명란젓 못지 않게 흔했지만 요즘은...거의 보기 힘들다. 네덜란드에서는 하링이라고 부르며, 늦봄과 초여름 사이에 잡히는 청어를 머리와 꼬리를 떼고 내장을 빼낸 뒤 잘게 다진 양파와 함께 먹는다.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통조림으로도 자주 접할 수 있는데, 대개 토마토 소스에 조린 것을 담아서 판다.

과메기라는 말린 청어가 있으며 쌈장에 찍어 싸먹거나 초장에 비벼먹는다. 기름져서 질리기 쉽지만 위의 요리처럼 독한 냄새는 안난다. 단 생선을 잘 못먹는 사람에게는 비린내가 심하기 때문에 혐오음식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일본에는 미가키 니싱(니싱미가키라고도 한다)이라는 말린 청어가 있는데 과메기와 달리 내장을 모두 손질하여 훈연 처리하여 북어처럼 바싹 말린다. 바싹 말린 것이기 때문에 물에 불려서 국물을 내서 같이 먹는다. 교토 지방에서 유명한데 교토 지방이 바다에서 멀기 때문에 해산물을 먹기 힘들어 자반고등어나 돔베기처럼 보존성을 높이기 위해 유행했다고 한다.
북유럽에서는 슈르스트뢰밍 외에 일반적으로 가시를 발려낸 후 식초에 절여서 피클처럼 만들어 먹는다고 한다. 이건 실(Sill, Sild)이라고 하는데 맛은 피클 비스무리하면서도 고소한 맛과 생선 살 특유의 식감이 좋다고 한다. 사실 위의 하링도 보통은 피클 형태로 먹는것이 일반적인 편. 外위키백과의 초절임 청어 항목

여담
이상하게 군대에서 청어튀김이 자주 나온다. 예비역들은, 모습은 꽁치나 정어리 비슷한데 훨씬 통통하고 가시가 많아(특히 배 부분) 먹기 성가셨던 생선튀김이 기억날 터인데, 그 생선이 바로 청어이다. 그런데 많이 나와도 이상할 것 없다. 그만큼 싸니까.
떼를 지어 몰려올 경우 워낙 대량으로 어획되는 탓에 기존의 시장 규모에서는 단시간에 소비가 불가능 해서 냉동 유통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2013년 12월 기준 남해안 어느 도시에서 잡힌 청어(산란기라 고니,이리가 있는)의 경매가격은 20kg 한상자에 9000원으로 그다지 비싼 것은 아니다.유통과정을 거치면서 소비자 입에 들어갈때쯤이면 2,3배 가격이 뛴다.
어획그물(주로 설치형)에 산란기에 청어때가 걸렸을때 위험을 느낀 청어들이 알과 정소를 뿌려대는데 이렇게 수정된 알들이 그물에 달라붙으면서 어장이 망가지기도 한다, 수정된 알은 엄청난 끈기가 있어서 그물에서 제거하기 매우 힘들 다고. 미국 토착원주민중에는 이 특성을 이용해 솔송나무가지를 물에 넣어서 청어알을 채집했다고 하고, 이 지역에서는 아직도 청어가 아닌 청어알을 먹기위해 그물을 설치한다고도 한다. 비늘이 얇지만 넓고 질긴 편이라 먹으면 소화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청어를 어획후 알만 빼서 버리는 지역에선 이걸 주워 먹은 바다표범들이 비늘 때문에 위장병에 걸려서 빼빼 말라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도 한다. 요리를 할 경우, 얇은 비늘이라 방심하지 말고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

EBS 프로그램 극한직업에 따르면 이 청어도 회가 맛있긴 하지만 대중들에게는 전어회에 비해 인지도가 떨어지고 덜 알려져서 판로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어부들에게는 전어에 비하면 찬밥대접을 받는다. 기차를 타고 가던 한 사람이 랍비(유대교의 목사와 교사를 겸한)를 만났다. 그는 랍비에게 그들의 지혜가 어디서 나오는 지 물었다. 그러자 랍비는 말린 청어를 머리까지(혹은 통째로) 먹으면 된다고 하며, 자신에게 청어 한 마리당 10달러에 사 보지 않겠느냐고 한다. 그 사람은 랍비에게 청어를 사 머리까지 꾸역꾸역 먹고는 얼굴을 찡그리며, '생각해보니 다음 역에서 잠시 내려 10달러로 청어 다섯 마리를 살 수 있었고, 당신이 사기를 쳤다'고 하자, 랍비는 '그것 봐라, 벌써 지혜로워지지 않았느냐'고 응수한다.

참고문헌
오주연문장전산고, 자산어보, 한국어도보(정문기, 일지사, 1977), 한국청어어업사(박구병, 부산수산대학논문집17, 1976), 朝鮮沿岸のニシンの生態及蕃殖に就いて(朝鮮總督府水産試驗場,1936),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3.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춘관통고, 공선정례, 본초강목, 한국동의보감, 세종실록지리지, 난중일기, 난호어목지, 성호사설, 성소부부고, 자산어보, 지봉유설, 오주연문장전산고, 중종실록, 본초강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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