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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실한과, 유과, 약과, 정과, 다식, 숙실과
 

임실 한과 맑고 깨끗한 섬진강변에 전통한과를 만드는 곳이 있다. 임실은 산이 많고, 물이 맑은 지역이라 물맛이 좋다. 공기 또한 청정하여 한과를 만드는 데 아주 적합한 기온과 환경을 갖추고 있다. 1975년 설립되어 부모로부터 기술을 전수받아 대를 이어 온지 30여 년이다. 오직 전통한과만을 고집하며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과는 만드는 과정이 복잡하고 번거롭기 때문에 일반 가정에서는 만들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약과나 유과와 같은 한과 외에도 많은 종류의 한과가 있다.
 
특히 임실전통한과는 청정지역인 섬진강 상류의 맑고 깨끗한 옥토에서 생산된 곡물을 엄선해 우리네 어머니의 정성으로 빚어 조선 선비의 그 기상과 얼이 담겨 있다. 한과는 여러 가지 곡식의 가루를 반죽하여 지지거나 튀기는 유밀과를 비롯해 가루재료를 꿀이나 조청으로 반죽해 익힌 과일이나 뿌리 등의 재료를 조청이나 꿀에 조려 만든 정과, 과일을 삶아 굳힌 과편, 과일을 익혀서 다른 재료를 섞거나 조려서 만든 숙실과, 견과류나 곡식을 중탕한 후 조청에 버무려 만든 엿강정 등이 있다. 임실전통한과는 무표백, 무방부제, 무가당으로 조제해 남녀노소 누구나 안심하고 먹을 수 있으며 그 맛이 담백하고 고소할 뿐 아니라 맛이 살아있는 망사구조로 여물어 있는 고급 한과이다. 임실군 덕치면 일중리는 회문산자락 끝에 있는 마을로 주로 잡곡을 많이 생산하고 있다. 어머니 손으로 정성껏 빚어 만든 임실전통한과(대표 문기섭)는 어려서부터 부모님이 한과를 만드는 과정을 보고 자라서인지 다양한 문양과 한과의 맛을 창출해 시선을 끌고 있다.
 
“누에고치 모양의 유과를 먹으면 1년이 길하다”라는 속담이 있다. 임실 전통한과는 직접 찹쌀로 만든 조청을 쓰고 있다. 할머니와 어머니의 정성이 듬뿍 들어간 한과라면 현대의 아무리 달콤하고 맛있는 과자라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전통한과는 날씨에 민감하여 습한 걸 싫어하고, 너무 건조해도 안 되기 때문에 습도에 가장 신경을 쓰고 있다. 한과의 고상한 빛깔은 산수유 잎과 뽕잎, 백년초에서 추출한 천연색소로 색을 쓰기 때문에 시중의 인공색소와는 차원이 다른 은은하면서도 기품이 있는 빛깔이 나온다고 한다.
역사라고 하면 전쟁, 정치적 사건, 제도, 세계적인 유물이나 중요 인물을 중심에 놓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역사의 거대한 흐름을 아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알게 모르게 그냥 지나쳐갔던 작은 것들이 우리 삶 속에 녹아들면서 만들어낸 작은 역사들도 모이면 큰 역사가 된다. 오랜 세월 사람들이 걸어온 발자취가 켜켜이 쌓이면서 우리 주변을 채우는 익숙한 것들에는 저마다의 역사가 있다. 이 작은 것들의 역사를 통해 우리 역사를 보다 폭넓게 알아보도록 하자.

과자는 언제부터 먹었을까?
역사 드라마를 볼 때면 늘 의문이 드는 것은 과연 저 시대에도 우리와 똑같은 것들을 먹고 입고, 사용했을까 하는 것이다. 심심하거나 출출할 때 자주 먹게 되는 과자. 이러한 과자를 삼국시대 사람들도 먹었을까? 우리 조상들은 언제부터 어떤 과자를 먹었던 것일까?
먼저 과자의 간단한 정의를 살펴보자. 과자는 정식 식사 이외에 먹는 단맛을 위주로 하는 기호식품을 말한다. 과자는 밀가루나 쌀가루에 설탕, 우유 등을 섞어 굽거나 기름에 튀겨서 만든 것으로, 쌀가루 등을 찌거나 삶아 익힌 떡과는 만드는 방법이 다르다. 주로 밀가루를 이용해 만드는 과자는 지금으로부터 약 4,000년 전 빵이 등장한 무렵부터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저장식품, 휴대식품의 기능도 있는 과자는 밀을 주식으로 하는 중동과 유럽 지역에서 크게 발전해왔다. 과자에는 생과자인 케이크, 파이, 도넛, 빵과자를 비롯해, 건과자인 스낵, 비스킷, 초콜릿, 사탕, , 효모로 부풀린 크래커, 특수 형태의 냉동과자인 아이스크림이 모두 포함된다. 이 같은 서양식 과자는 개항 이후인 1884년 무렵에 손택(孫澤)이 정동구락부를 개설하여 서양 음식을 소개한 이후부터 우리나라에 도입되었다. 밀을 거의 재배하지 않았던 우리나라에서는 과자보다는 떡이 발전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과자
그렇다고 우리나라에서 과자가 발전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우리의 전통의 과자로는 한과(韓菓)가 있다. 한과에 대한 가장 빠른 기록은 [삼국유사]의 ‘김유신전’에서 찾아볼 수 있다.
613년 신라 김유신은 고구려 첩자인 백석(白石)란 자의 꾐에 빠져 고구려로 납치될 뻔 했었다. 이때 김유신을 구하기 위해 내림, 혈례, 골화 등 세 곳의 호국신이 여인의 모습을 하고 나타났다. 이들은 김유신에게 맛있는 과자(美菓)를 대접해주면서 백석이 첩자라는 사실을 알려주어 그를 위기에서 구해주었다.
김유신이 이때 먹은 맛있는 과자는 어떤 것일까? 과자를 뜻하는 과()자는 과일 ‘과()’자에 풀초 변()을 더한 것이다. 이는 최초의 과자가 과일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말린 과일인 과편(果片)은 오늘날의 젤리와 비슷한 것으로, 본래 과일을 오래 보관해 먹기 위해 만든 것이다. 서양에서도 과자의 시작을 곡물에 과즙을 가미한 것으로부터 기원했다고 본다. 사과·레몬·밤·아몬드·블루베리·포도·자두 등의 각종 과일이 중동과 유럽 등에서 풍부하게 생산되었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는 일찍부터 과일의 단맛과 향을 이용한 제과기술이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과편은 빛깔이 고우면서도 변하지 않고, 과육의 맛이 부드럽고 적당히 시큼한 살구, 앵두 등으로 만들었다. 건조시켰을 때에 빛깔이 변하는 사과, , 복숭아는 과편을 만들기에 적합하지 않았던 것이다. 과편을 만드는 방법은 잼을 만드는 법과 비슷하게 과일을 삶고, 조리는 방법을 통해 복분자편, 살구편, 앵두편 등을 만들어 먹었다. 따라서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김유신이 먹는 과자는 과편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삼국시대의 과자
고구려 무용총의 널방 북벽 그림. 주인공과 스님들의 담소 모습에서 아직까지 차와 과자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과자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된 것은 중국 불교의 도입과 당나라의 영향 탓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불교에서는 차() 공양(供養)을 하는 것을 수행의 한 방법으로 여겨 널리 차를 사랑했다. 차 문화는 차와 곁들여 먹는 다식(茶食)문화도 함께 발전시켰다. 5세기에 만들어진 고구려 춤무덤(무용총)의 널방 북벽에는 무덤 주인공이 스님 두 분과 담소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 있다. 하지만 이 그림에서는 과일은 보이지만, 차나 과자를 담은 그릇은 보이지 않는다. 불교가 도입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아직 과자를 만드는 방법이 널리 소개되지 않은 탓일 것이다.
 
동위(東魏)의 고양태수 가사협이 530550년 경에 편찬한 종합 농업서적인 [제민요술] 9권에는 밀가루나 쌀가루에 꿀, 엿기름 등을 섞어 기름에 지지거나 튀기는 과자 만드는 법이 등장한다. 북중국에서 시행된 과자 만드는 방법은 고구려에도 전해졌을 가능성이 높다. 645년 고구려 백암성이 당나라에 항복했을 때, 고구려의 노인과 승려가 당나라 임금에게 이락, 곤포, 미병(米餠), 무이고 등을 바쳤다는 [책부원귀]의 기록이 있다. 본래 쌀·기장·조·콩 등으로 만든 떡은 이(), 밀가루로 만든 것은 병()으로 표시했으므로, 여기서 미병은 쌀로 만든 과자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 역사에서 과자를 널리 먹게 된 시기는 7세기 이후였다고 할 수 있다. 당시 당나라에서는 조리용 도구로 철냄비가 등장하면서 튀긴 음식이 발전하게 되어 당과자(唐菓子)가 만들어졌다. 이때 일본에서는 당과자 8(매자, 단희, 도자, 갈호, 계심, 점제, 퇴자, 필라), 과병(果餠-환병, 부주,결과, 엽두, 색병, 분숙, 흔둔, 담모, 박탁, 어형, 춘병, 병향, 거여, 전병) 14종이 등장했다. 일본보다 당나라와 교류가 더 활발했던 신라에서도 이런 과자들을 먹었음이 분명하다. 이후 우리나라에서 발전한 과자로는 유밀과(油蜜果)가 있다.
 
고려의 유밀과
고려 시대에는 찹쌀가루로 만든 유밀과가 인기가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1157년 의종 임금이 사찰에서 유밀과를 구한 바가 있다. 차문화를 적극 발전시킨 사찰에서는 차와 함께 먹는 과자를 직접 만들었던 것이다. 차문화가 일반 대중에게도 널리 퍼지면서 유밀과도 함께 대중들에게 인기를 얻게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연등회, 팔관회 등 국가적 행사는 물론 임금의 탄생일 등 연회에 유밀과를 중심으로 한 다과상을 차려놓곤 했다.
1296년 충렬왕은 세자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원나라에 갈 때에 유밀과를 가져가서 잔치에 내놓았는데, 그 맛이 입 속에서 살살 녹을 듯하다는 평을 들으며 몽골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이후 고려의 유밀과는 원나라에 고려병(高麗餠)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유밀과는 기름과 엿기름 또는 꿀을 이용한 기호식품이었다. 또한 왕이 행차할 때 고을이나 절에서 진상품으로 올리기도 했던 고급 제품이었다. 그런데 고려에서는 끊임없이 유밀과를 금지하는 명령을 내린다. [고려사] 형법금령에는 유밀과를 만드느라 곡물, , 기름 등을 허비함으로써 물가가 오르고 민생이 말이 아니므로, 유밀과의 제조를 금지하고 나무열매를 쓰도록 했다는 내용이 있을 정도로, 유밀과는 고려시대에 큰 인기를 끌었다.
 
연회상의 단골 메뉴, 과자
조선 시대 임금들은 다양한 과자를 즐겼다. 임금님은 하루에 죽수라, 조수라, 주다소반과, 석수라, 야다소반과 등 5번 음식을 드시는데, 그 중 주다소반과(晝茶小盤果)에는 2종류의 과일 외에 강정, 정과, 조란, 율란, 강과, , 병 등 6종류의 과자를 올렸다. 조선이 명나라 사신을 접대할 때의 기록을 살피면 접대상에 과일, 약과, 다식, 그리고 당과자에서 유래한 튀김 종류의 과자를 올렸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궁중에서뿐만 아니라, 양반집에서도 약과와 다식 등의 유밀과와 강정류를 먹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잔칫상에는 이들을 높이 괴어 올렸다. 특히 과자 제조의 전문기술을 가진 사람과 고임새가 빼어난 사람들이 초빙되어 그 일을 담당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궁중연회상에는 24가지의 한과류를 모두 18치의 높이로 고여 올리기도 했다. 조선시대에 과자는 연회상에 올라가는 전체 음식의 반을 차지하는 음식으로 성장했고, 민가에서도 혼례, 제사, 연회 때 상차림의 대표적인 음식으로 각광 받게 되었다.
 
우리 과자의 종류
‘유과’는 찹쌀가루에 콩물과 술을 넣어 반죽하여 삶아낸 것을 얇게 밀어 말렸다가 기름에 튀겨내어 쌀 고물을 묻힌 우리 과자의 대표종이다. 여름철에는 덥고 습기가 많아서 엿이 늘어져 만들기가 어려워, 겨울철 특히 설을 앞두고 많이 만들었다. 유과는 크기나 제조방법에 따라 이름이 달라지는데 큰 것은 산자, 손가락 굵기는 강정, 팥알 만하게 썰어 말려 튀긴 후에 엿으로 뭉쳐 모나게 썬 것을 빙사과(賓砂果, 氷砂果)라고 한다.
‘약과’는 밀가루에 참기름과 꿀을 넣어 만드는 유밀과의 일종으로, 제사 지내는 데에 빠지지 않는 음식이다. 20세기 초 최남선은 조선이 만든 과자 가운데 약과가 가장 상품으로, 세계에 그 짝이 없는 특색 있는 과자라고 칭찬한 바 있다.
‘정과’는 생과일이나 식물의 뿌리 또는 열매에 꿀을 넣고 조린 것이다. 정과는 신맛도 없애고 오래 보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궁중의 잔치에는 모과, 유자, 생강, 도라지, 연근, 청매, , 천문동 등으로 만든 정과를 차렸다. 이 외에도 호두, 인삼, 생강, 죽순, 송이, 복숭아 정과 등도 있었다.
‘다식’은 쌀, , 밤 등을 가루 낸 것이나 송화가루 등을 꿀로 반죽하여 나무로 만든 틀인 다식판에 찍어낸 것이다. 밤다식, 송화다식, 흑임자다식, 잡과다식 등이 대표적이다.
‘숙실과’는 밤, 대추 등에 꿀을 넣고 졸이거나, 이를 삶아 으깨서 꿀, 계피가루에 버무려 밤, 대추모양으로 만들어 잣을 끝에 꽃은 율란, 조란을 말한다. 주로 잔치음식으로 쓰였으며 제사상에 올리기도 했다.
 
우리과자 한과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밀을 많이 재배하지 않았기에, 밀가루를 주된 재료로 하는 과자의 발전은 서양이나 중국에 비해 늦었다. 하지만 7세기 이후 발전하기 시작한 한과는 찹쌀가루, 과일, , 계피, 꿀 등과 같은 고유한 재료를 이용해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먹을거리로 발전하여 왔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삼국유사]; [고려사]; [책부원구(冊府元龜)]; 빙허각 이씨 원저, 정양원 역주, [규합총서(閨閤叢書)], 보진재, 1975; 가사협 편찬, 구자옥 외 역주, [제민요술(齊民要術)], 농촌진흥청, 2006; 이성우, [동아시아 속의 고대한국 식생활사 연구], 향문사, 1992; 김상보, [한국의 음식생활문화사], 광문각, 1997,, 김용만|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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