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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령군 봉수면 서득리 지촌한지
 

봉수면 서득리 지촌한지
의령군 봉수면 한지의 유래가. 유래   지금부터 1000 여 년 전 고려시대. 경남 의령군 봉수면 소재 국사봉 중턱 '대동골'계곡에 대동사란 큰 절이 있었다. 이 절에는 설씨 주지스님이 있었는데 어느 봄날 산자락과 밭두렁에 지천으로 나 있는 야생 닥나무 가지를 꺾어 보았더니 껍질이 아주 질기다는 것을 알고, 개울 물속에 한나절 담가 두었다가 건져내보니 아주 부더러 우면서도 질긴 섬유질이 생기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걸 돌로 찧어서 너럭바위 위에 얇게 펴서 널어 말렸더니 빛깔도 곱게 바래어진 채 아주 질 좋은 닥종이가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이 일이 기원이 되어 이 곳을 비롯한 인근지역으로 전파되어 대량으로 생산되었고 지역 유명 특산물이 되기에 이르렀으며, 가내수공업 형태의 한지 주산지가 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진상품으로 조정에 올리기도 했고 중국에까지 팔려 나가면서 전국적으로 알려진 곳이며 이런 연유로 해서 한동안 이곳 지명이 지촌면으로 불리기도 한 것이다. 근래에 와서는 산업 구조의 변화와 함께 한지의 생산도 기계화 기업화되면서 전통 수공업에 의한 닥종이 생산은 그 명맥을 잇기도 어려운 상황에 이르게 되었지만 우리고장의 자랑스러운 특산물일 뿐 아니라 전통문화의 보존과 계승발전을 위하여 계속 생산 보급하고 있는 이곳을 시범 문화마을로 지정 받음과 함께 전시관을 건립하기에 이른 것이다.
 
우리나라 한지의 유래
A.D 105, 중국 후한시대에 "채륜" 이 종이를 발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한지가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시대인 372, 불교와 함께 전래된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낙랑고분" 에서 출토된 닥종이 뭉치 등으로 미루어, 우리의 종이 역사는 1500 ~ 1600년 전에 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종이는 신라시대의 다라니로 751년 이전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종이는 대략 BC 2세기에 중국에서 발명되었으며 1986년 감숙성 천수시 팡마탄에서 BC 179~141년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무덤에서 종이가 발견되었는데, 이 종이는 마지로 품질이 매우 좋아서 그 이전에 이미 종이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전래된 시기는 채륜이 어망과 마넝마 및 수피)를 이용해 종이를 만들면서 대량생산이 가능해진 뒤로 생각된다.
우리나라에 종이나 제지술이 전해진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몇 가지의 접근방법을 통해 그 연대를 추정해 볼 수 있다. 첫째, 〈니혼쇼키〉에 3세기말 백제의 왕인이 일본에 〈천자문〉과 〈논어〉를 전해주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종이로 된 서적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610(영양왕 21) 고구려의 승려 담징이 종이·먹·채색·맷돌을 전할 때 종이와 함께 제지술도 전수해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이 기록에 의해 우리나라에 종이가 들어온 하한시기와 당시 우리나라에 제지술의 존재여부를 추정해 볼 수 있다. 둘째, 4세기말 불교가 전래되면서 불경과 함께 제지술도 전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불교에서 사경을 많이 보시하는 것이 공덕을 쌓는 일이기 때문이다. 셋째, 평양 부근에서 낙랑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채협총에서 칠통과 함께 종이뭉치가 출토되었고, 평양 대동강가에서 고구려시대의 〈묘법연화경〉이 발견되어 늦어도 2~7세기 사이에 매우 발전된 제지술이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넷째, 우리가 한지의 대명사로 쓰고 있는 '닥지'라는 말에서 종이의 전래시기를 살펴볼 수 있다. 닥은 한지의 주원료로 한자로 표기하면 ''인데 중국에서는 BC 2세기부터 AD 2세기까지 닥으로 읽혀졌다. 그러므로 ''가 닥이라고 읽혀졌던 시기에 우리나라에 종이 원료인 닥과 함께 제지술이 전해졌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 후 3, 4세기의 음가가 밝혀지지 않은 것을 감안하더라도 4세기 이전에는 우리나라에서 종이를 만들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우리나라에는 2~4세기에 종이와 제지술이 전해졌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봉수면 서득리에서 생산되는 전통한지는 다음과 같은 유래를 간직한 채 지금까지 전통한지의 맥을 이어오고 있음.
 
진상품 관련이야기
봉수면 서득리에서 생산되는 전통한지는 다음과 같은 유래를 간직한 채 지금까지 전통한지의 맥을 이어오고 있다.
지금부터 1,000여년전 고려시대 국사봉(의령군 봉수면 소재)중턱 대동사란 큰절이 있었다. 이 절에는 설씨라는 성을 가진 주지 스님이 있었는데 어느 봄날 산자락과 밭두렁에 지천으로 나있는 야생 닥나무 가지를 꺾어 보았더니 껍질이 아주 질기다는 것을 알고 개울물 속에 한나절 담가 두었다가 건져내 보니 아주 부드러우면서도 질긴 섬유질이 생기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걸 돌로 찧어서 너럭바위 위에 얇게 펴서 널어 말렸더니 빛깔도 곱게 바래어진 채 아주 질 좋은 닥종이가 만들어진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진상품으로 조정에 올리기도 했고 중국에까지 팔려나가면서 전국적으로 알려진 종이고장이 되었고 이런 연유로 해서 한동안 이곳 지명이 지촌면으로 불리어 지기도 했음.
 
이와는 조금 다른 내용의 구전설화가 의령의 향우지인 『의령향우』에 정리되어있다. 1,000년 전 고려 때 의령군 봉수면 서암리에 국사봉 중턱에 약 20년 전까지 터가 있었다는 대동사의 주지 ‘설()’씨가 어느 봄날 닥나무 껍질을 흐르는 냇물에 담가 두더니 껍질이 물에 풀리면서 삼베 올처럼 섬유질이 생기는 것을 발견하여 이를 손으로 주물러서 바위 위에 건져 놓았더니 종이와 같은 물체가 만들어져, 이것을 계속하여 종이를 만들었다” 고 전해진다.
 
 
상품정보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에게 ‘가장 인상 깊은 것이 무엇입니까’란 질문을 던지면 의외로 ‘아침에 일어났을 때 방안으로 들어오는 따사로운 햇살입니다’란 대답을 자주 듣는다. 가장 한국적인 멋을 잘 표현한 대답 중 하나다. 따사로운 햇살의 원천은 바로 천년을 간다는 우리 민족 전통 종이인 한지로 창과 문을 발랐기 때문이다. 닥나무 껍질을 재료로 해서 만든 한지(닥종이)는 흔히 창호지를 말한다. 백지선지. 피지. 황백지. 화선지. 장지. 색문지 등 다양하다. 입에다 대고 불면 바람이 통하지만. 한겨울 서릿바람을 막아내는 보온기능도 뛰어나다.
국내 닥나무는 중국산보다 섬유질이 질겨. 좋은 연을 만들 때는 한지를 써야 제격이다. 게다가 공예품. 장식품 등의 재료로도 다양하게 활용된다.
이런 한지의 최초 생산지가 의령군에 있다는 사실에 자긍심을 가져도 좋다. 하지만 지금의 한지는 값싼 양지와 중국지에 밀려 설 자리를 잃었고. 한지 생산과정과 기술을 잇기도 힘든 상황이다. 고향을 지키며 증조부 박경용옹 이후 4대째 박해수(64·봉수면 서암리)씨가 의령 한지의 맥을 잇다. 1950~60년대만 해도 한지는 귀한 것이었고. 만들면 팔려 나가는 우수한 상품이었다.
그는 초등학교 때는 잔심부름을 하고. 13살 본격적으로 일을 배워 15살 때 직접 한지를 만들었다.
한지를 만든다는 것은 생계의 수단이었고 전통의 맥을 잇는다는 큰 의미는 없었다. 산과 들에서 닥나무를 베고. 껍질을 벗겨 종이를 만드는 일은 단지 자연스러운 일상의 일이고. 그 곳에서 생산과정과 기술이 전해졌던 것이다.
당시 서암리에는 80% 이상이 한지를 만들었고 부림면 신반리에 신반4·9(오일장)이 서는 날이면 지게에 지고 머리에 이고 한지를 팔러 나가기 바빴다고 한다.
군대를 갓 제대한 그는 전국의 닥종이를 모아 마을에 내려놓고. 봉수 한지를 전국에 내다파는 일을 할 정도였다고 했다.
한지가 시들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들어서다.
펄프를 수입한 제지공장이 들어와 기계로 양지를 제작하면서 한지가 주눅 들기 시작했다.
종이 질로 치자면 한지를 따라올 수 없지만 가격 면에서는 양지가 경쟁이 되지 않았다. 공산품과 수공예품의 차이였다.
양지가 서서히 한지를 밀어내기 시작했고. 한지를 만들던 마을 사람들도 하나둘 외지로 떠났다.
결국 서암리 80여 가구 중에 지금껏 한지를 만들고 있는 인근의 강상문(69)씨와 둘뿐이다.
그는 “간혹 어떻게 만드느냐고 전화로 물어오는 사람들이 있지만 직접 배우려고 오지는 않는다. 고 했다. 한지는 실습이 중요하지만 이것만으로 생계를 이어지는 어렵기 때문이다.
“한창때는 500(100만장) 정도를 혼자서 만들었는데 이제는 1년에 10(2만장) 정도를 만들고 있다생산기술 맥 잇기 어려워
그는 “한지기술은 누가 이어도 이어야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어렵다.
자식들에게 물려주기도 부담이 된다고 하니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지난 2000년 의령 한지의 도 무형문화재 지정이 추진된 적이 있다. 사라져 가는 문화유산을 계승하고 보존하려는 노력의 결실이었다. 하지만 지정되지 못한 채 지금까지 오고 있다.
당시에는 봉수 전통한지전승보존회가 이 같은 일을 추진했지만. 이제는 사람들도 떠나고 유명무실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
 
한지 생산과정 ① 닥나무 채집 → ② 닥나무를 증기로 찜 → ③ 껍질을 벗기는 작업 → ④ 물에 담가 불린다(12시간 불린다) → ⑤ 겉껍질을 벗긴다. → ⑥ 잿물에 삶는다. → ⑦ 닥메로 두들긴다. → ⑧ 물통(보걸이틀)에 넣어 잿물을 빼낸다. → ⑨ 건져서 물기를 빼낸다. → ⑩ 표백통에 넣는다. → ⑪ 지통에 넣고 닥풀과 함께 혼합(풀개 작대기로 푼다) → ⑫ 발로 뜬다. → ⑬ 철판에 말린다. → ⑭ 완제품(창호지. 백선지. 피지 등 생산)
 
한지의 용도
한지는 현대와 같이 여러 가지 지식전달매체가 없던 시대에 상당히 중요한 서사 재료였다. 처음 우리나라에 들어올 때는 서적의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가장 중요한 용도 역시 전적이었다. 따라서 오랜 기간 보관이 가능하고 해지지 않는 두꺼운 종이가 좋다는 평가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문헌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종이의 용도는 종이 연으로 에 그 기록이 보인다. 고려시대 문헌을 보면 불경을 인출하기 위해 많은 종이가 필요했던 것을 알 수 있으며, 현재와 같이 각종 용도에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부터이다. 태종대에 중국에 보내는 자문지의 확보와 저화의 규격을 일정하게 하고, 원료의 확보와 제지술을 발전시키기 위해 국영 제지공장이자 관서인 조관지를 설치했다.
조선시대에는 서책뿐만 아니라 각종 관공문서·창호·꽃·종이돈과 그림을 그리는 데 사용되었다. 또한 한지의 질긴 특성 때문에 부채·우산 등에도 많이 사용되어 중국의 호평을 받았으며, 부의지로도 중국에 많이 보내졌다. 조선시대 이후 벽지로도 사용했으며, 종이를 꼬아 생활용기나 장식품을 만들었는데 이를 지승공예라고 했다. 지승공예는 사대부들이 취미 삼아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들 공예품은 미적 감각이 뛰어났으며 그 형태도 바구니·가방·상·물병·지갑 등 다양하다. 오늘날에는 서화용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며 특별한 풍취를 낸 서간지도 유통되고 있다. 질기고 부드러우며 탄력성과 번짐성이 있어서 판화지로도 적당하다. 더욱이 보존성이 뛰어나 작품을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뛰어난 재료이다. 한지는 기계지보다 우수하여 50배나 긴 생명력을 갖고 있으며, 최근에는 한지를 재료로 하여 작품을 만드는 작가들이 늘어나고 있어 매우 고무적이다.
                         관련근거 및 출처 : [傳統韓紙展示館] (두산백과,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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