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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화문석, 보성 용문석, 화문석은 예로 부터 용수초지석(龍鬚草地席), 오채용문석(五彩龍紋席), 용문염석(龍紋簾席), 오조용문석(…
 

 
강화 화문석(江華 花紋席), 보성 용문석(寶城 龍紋席)
신라시대 때부터 이미 화문석의 생산을 담당하였던 관청이 있었다. 삼국사기 직관조(職官條)에 석전(席典)으로 불리던 부서가 경덕왕 때 봉좌국(奉坐局)으로 바뀌었으며 뒤에 다시 석전으로 개칭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 두 가지 이름으로 미루어, 이들이 자리류의 생산을 담당하였던 관청이었으리라는 점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자리류의 생산을 국가기관에서 담당하여야 할 만큼 이에 대한 수요가 높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 같은 책에 육두품(六頭品) 이하의 벼슬아치도 수레 앞뒤에 휘장 삼아 완석(莞席)을 늘였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것을 화문석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고려에 들어와 화문석은 외국에까지 널리 알려졌으며 인삼과 더불어 중요한 수출품 내지 선사품이 되었다. 고려 초에 요나라에 보낸 특산품 가운데 용무늬를 넣은 화문석(龍鬚草地席)이 들어 있으며, 송나라 사람들도 고려의 화문석을 매우 탐내었다고 한다. 북송(北宋)의 서긍(徐兢)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 정교한 것은 침상과 평상에 깔고 거친 것은 땅에 까는데, 매우 부드러워 접거나 굽혀도 상하지 않는다. 검고 흰색이 서로 섞여서 무늬를 이루고 청자색 테가 둘렸다. 더구나 침상에 까는 자리는 매우 우수하여 놀랍기만 하다.는 극찬을 하였다.
 
화문석의 수요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급증하였으며, 특히 외국인의 애호열은 더욱 높아졌다. 통문관지(通文館志)에 따르면 한 번의 동지사행(冬至使行) 때 중국에 보낸 화문석이 124장에 달하였으며, 우리나라에 오는 관리들에게도 적지 않은 양을 선사하였다. 화문석의 조달을 담당한 기관은 장흥고(長興庫)로서, 이곳에서는 각 지방으로부터 필요한 수량을 거두어들였다.
 
화문석은 예로 부터 용수초지석(龍鬚草地席), 오채용문석(五彩龍紋席), 용문염석(龍紋簾席), 오조용문석(五爪龍紋席), 만화석(滿花席), 각색세화석(各色細花席), 채화석(彩花席), 잡채화석(雜彩花席), 황화석(黃花席), 화석(花席) 등 여러 가지로 불렸다. 용수초지석이라는 이름은 왕골이 용의 수염처럼 생긴 데에서 왔다. 그리고 오채용문석, 용문염석, 오조용석은 용모양의 무늬를 넣어 짠 데서 왔다. 오채용문석은 다섯 가지 색으로 짠 용무늬 꽃자리이고, 오조용문석은 다섯 개의 발톱이 달린 용무늬 꽃자리라는 뜻이다. 이러한 것들은 극상품이어서 앞에서 말한 대로 왕실에서 중국에 보내는 선물용으로 생산되었다. 용문염석은 용무늬 발로서 역시 궁중에서 썼으리라고 짐작된다.
 
진상품 기록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여지도서(輿地圖書) 등에 따르면 채화석(彩花席), 황룡화석(黃龍花席), 왕골(莞草), 초석(草席), 별문상석(別紋上席), 소룡화석(小龍花席), 연화방석(連花方席), 잡채화석(雜彩花席) 등이 경상도 안동, 전라도 보성 등지에서 진상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화문석의 재료
조선에서는 왕골 생산지로 안동의 예안을 손꼽았다. 임원경제지에 인용된 금화경독기(金華耕讀記)에는 영남의 안동 예안 사람들이 오채용문석을 잘 만들어 공물로 바친다. 서울의 지체 높은 가정이나 사랑에서는 해서, 배천, 연안의 것을 제일로 쳤으며, 경기 교동(喬桐 : 강화도 서북쪽 섬) 것은 버금간다.고 하였다.
이것으로 미루어, 강화도 화문석은 근래에 널리 알려진 듯하다.
 
왕골은 사초과에 속하는 1년생 초본식물로서 줄기는 세모꼴이며 줄기 꼭지에서 꽃이 나와서 잔 꽃이 피며 1.21.5m로 자라며, 줄기의 단면은 사각형을 이룬다.. 4월 중순에 뿌린 씨가 싹이 터서 5㎝쯤 자라면 5월 초순에 옮겨 심었다가 8월 상순부터 9월 사이에 거두며 길이는 1.52m에 이른다.
 
줄기의 섬유 조직은 매끄러우며 윤택이 나고. 매우 질기며 다 자라면 누른빛으로 변한다. 거두어들인 왕골은 줄기의 각에 찬이슬을 맞혀가며 34일 동안 바짝 말린다. 이렇게 하여야 빛이 하얗게 바래서 윤기가 난다. 물을 들이는 부분은 중간대로서(길이 3050) 하루쯤 물에 담갔다가 속을 칼로 훑어낸다. 겉껍질이라야 염료가 적게 들고 물감이 곱게 먹는다. 물든 왕골은 문양에 따라 뽑아 쓰기 좋도록 죽으로 엮어 건조한 곳에 걸어둔다. 물감으로는 회색·검은색·붉은색·누른색·진황색·자색·남색·녹두색·반물 등 아홉 가지를 쓴다. 왕골은 자리틀에 올리기 전에 물에 적셔둔다. 물기가 있으면 부드러워서 매기 쉬운 반면 마른 것은 갈라지거나 부서지며 잘 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배수가 불량하고 유기물의 함량이 높아서 벼의 재배에 부적합한 저습답 또는 고래실에서 많이 재배된다. 왕골은 줄기를 피부(皮部)와 수부(髓部)로 분리하여 건조시킨다. 실 모양으로 가늘게 쪼개어 말린 것으로는 돗자리, 방석, 여름베개, 모자, 발 등을 만들고 질긴 왕골속으로는 둥구미를 만든다. 특히 보성의 용문석은 뒷면을 이것으로 덧댄다. 왕골은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 각지에서 재배되는 우리나라 특유의 공예작물로, 그 생산도 우리나라에 한정되어 있다.
 
골풀은 골풀과에 속하는 다년생 초본식물로 높이가 50100㎝ 정도이다.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일본, 대만, 중국 등지에도 분포하는데, 돗자리 이외에 방석을 만드는 데도 쓰인다. 돗자리는 거의 농가의 부업으로 영남, 호남 지방이 주산지를 이루고 있다.
 
화문석은 정사각형이나 직사각형으로 짜게 마련이어서 형태상의 변화는 거의 없으며 다만 무늬에 다양성이 나타날 뿐이다. 이것을 매는 사람 수는 너비에 따라 달라서 석 자에서 다섯 자 크기에는 두 사람, 여섯 자에서 일곱 자 크기에는 세 사람, 여덟 자에서 아홉 자 크기에는 네 사람, 열 자에서 열두 자 크기에는 여섯 사람이 한 동아리가 된다.
 
세 사람이 너비 예닐곱 자의 화문석 한 장을 짜는 데에는 닷새쯤 걸린다. 초보자는 2년쯤 배우면 기술을 익힐 수 있다. 흔히 화문석과 등메를 혼동하나 등메는 한올씩 가마니 치듯 바디로 다져서 짜며 무늬도 물들인 골로 수놓듯 짜는 것이다. 재료 또한 달라서 등메에 드는 참골은 줄기가 둥글고 가늘다. 예로부터 화문석보다 등메를 윗길로 쳤다.
 
화문석의 종류
화문석 꽃방석
화문석 꽃방석, 돗자리는 왕골에 물을 들여 손으로 덧 겹쳐가며 엮은 다음, 무늬에 따라 잘라낸 꽃돗자리를 말한다. 왕골은 재배가 손쉽고 이를 매는 일도 까다롭지 않아서 이것이 자라는 곳에서는 거의 누구나 짤 수 있다. 그리고 겉이 매끄럽고 기름져서 물이 잘 스미지 않고 매우 부드럽다.
 
여름철에 화문석을 마루에 깔고 그 위에 눕거나 앉으면 더위를 덜 수 있어서 널리 애용되었으며 무늬 또한 아름다워 집치장에도 한몫을 담당하였다. 더구나 좌식생활(坐式生活)을 하여왔던 우리에게 화문석은 빼놓을 수 없는 살림살이의 하나였으며, 이것이 일찍부터 중요 공산품으로 손꼽혀왔던 것도 그 때문이다.
 
대청마루에 돗자리를 깔아놓은 모습으로 왕골이나 골풀의 줄기를 잘게 쪼개어 친 자리다. 삼국사기에 수레를 대발과 왕골(莞草)로 꾸몄다는 기록이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왕골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밖에 별문석(別紋席), 호문석(虎紋席), 난초석(蘭草席) 등 많은 종류가 있다.
 
용문석(龍紋席)
궁중에서 잔치를 여는 장면에서 등장하는 돗자리의 일종이다. 특히 용문양을 수놓은 왕골 돗자리를 용문석이라 하는데, 전라남도 보성의 것이 유명하여 200년 전부터 궁중에 납품하였다. 용문석의 무늬는 가장자리에 자 모양의 선을 두르고, 자리 중앙에 여의주를 넣은 다음 양편에는 청룡과 황룡이 마치 여의주를 다투듯 꼬리치는 모습을 수놓았다.
 
제조방법에 따른 분류
같은 왕골로 만들더라도 제조방법에 따라 돗자리와 자리로 구분하기도 한다. , 돗자리는 가마니틀과 비슷한 돗틀에 미리 날을 걸어두고 골을 바늘대에 걸어 지르고 바디질을 하여 짠다. 자리는 날을 고드랫돌에 감아 장목에 늘어놓고 골을 대어 엮어나간다. 돗자리는 날이 속으로 감춰지고 자리는 날이 밖으로 노출되는 것이 특징이다. 자리에 속하는 것으로 유명한 것은 인천광역시 강화에서 만드는 화문석(花紋席)이다.
 
보성 용문석은 400여년간 전국에서 유일하게 수작업으로 생산하고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진상품으로 취급되었고 근래에는 선물용으로 주문 생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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