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청자,청화백자,월주 찻잔, 전남 강진 청자주병과 청자 술잔 60점이 특별제작 해 2010년 청와대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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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청화백자를 번조(燔造)하기 시작한 것은 1457년(세조 3) 중국에서 회청(回靑)이 수입된 뒤부터이며, 세조실록에 의하면 1465년(세조 11)에 최초의 제품이 생산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1469년(예종 1)에는 전남 강진산(康津産) 토청(土靑:나라 안에서 생산된 청화안료)으로 청화백자가 생산되었고, 그 후 중국에서 수입한 회청이 함께 사용되었다.
다경(茶經)의 다완편(茶碗編)에서 다기(茶器) 가운데 가장 최고가 청자 찻잔이며 그 가운데 최고는 절강성에서 만들어진 월주 찻잔이라 쓰고 있다.
강진군 대구면 일대는 우리나라 중세미술을 대표하는 고려청자의 생산지다. 1963년 사적 제68호로 지정된 대구 고려청자 도요지는 9세기부터 14세기까지 5백여 년간 집단적으로 청자를 생산했던 곳으로 9개 마을에 180여개소의 가마터가 분포되어 있으며, 약 18만여 평을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고려시대 집단적으로 청자를 생산했던 곳으로 이곳 강진과 부안 등을 들 수 있으나, 전국적으로 지금까지 발견된 400여기의 옛 가마터 중 대부분이 이곳 강진에 분포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사당리는 제작기술이 최절정을 이룬 시기에 청자를 생산하였던 지역으로, 우리나라의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청자의 80%이상이 이곳에서 생산되었을 정도로 그 기법의 천재성과 예술적 가치를 세계적으로 인정받아 왔으며, 프랑스 루부르 박물관에도 보관되어 있다. 또한, 강진은 다른 지방에 비해 태토, 연료, 해운, 기후 등 여건이 적합하여 우리나라 청자 문화를 주도해 왔으나, 고려말기에 청자 기법이 쇠퇴한 후 600여 년 동안 전승되지 못한 채 단절되어 오던 것을 1977년부터 재현사업을 하여 재현에 성공하였다.
전남 강진 청자주병과 청자 술잔 60점이 특별제작 해 2010년 청와대에 들어갔다.특별 제작되어 청와대에 납품된 청자작품은 청자주병 10점과 술잔 50점이며 주병은 24~26cm크기로 1리터와 1.5리터 용량으로 5~8잔 기준이다.주병 가격은 7만원과 8만원에 판매되는데 주병 몸체에는 2008년 이명박대통령이 취임식에서 신년화두로 밝힌 시화연풍(時和年豊)을 시문했고 농악무(舞)를 양각으로 표현했다.청자술잔은 고려청자 대표기법인 상감기법으로 구름과 학 무늬를 생동감 있게 조각했으며 작품 밑 부분에는 강진청자박물관이 제작했음을 증명하는 ‘강진관요’낙관을 표기했다.안금식 강진청자박물관장은 “시화연풍(時和年豊)은 나라가 태평하고 해마다 풍년이 든다는 뜻으로 국민화합과 경제성장의 의지를 담고 있으며 농악무는 풍년을 기뻐하는 농민들의 흥겨운 춤사위를 양각 처리해 은은하면서 역동감있게 표현했다.”고 밝혔다.또한 전통방식으로 제작된 강진청자 주병과 사발(잔)은 음이온이 다량 발생되어 막걸리의 신선도 유지와 함께 인체에도 이로운 효능이 숨어 있다고 말했다.1977년부터 고려청자의 맥과 전통을 잇기 위해 재현사업을 펼쳐온 전남 강진군은 천연 자연유약의 개발 등 완벽한 비색청자의 재현에 성공했고 지금도 전통방식 그대로 작품을 제작하고 있다.우리나라 청자의 발생
우리나라는 삼국시대에 고화도로 환원 번조한 토기를 만들었다. 삼국토기 중에서도 신라·가야토기는 질적으로 가장 우수한 것이어서 1,200℃ 이상이나 올라가는 고화도환원번조로 표면색은 회청흑색이고 무쇠같이 단단한 것이었다.
삼국시대의 토기를 거쳐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토기에서 자기로 이행되는 기반이 확립되었다. 통일신라시대 토기는 부장용(副葬用)보다는 주로 실생활용으로 안정된 것이었다. 이때는 삼국시대부터 시작된 토기 표면에 유약을 입힌 연유계(鉛釉系)인 녹유토기(錄釉土器)와 갈유토기(褐釉土器)가 발달하여 세련되고, 8세기경부터는 회유토기가 발달하여 시유토기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고 있어서, 토기에서 자기로 이행되는 기반이 확립되었다. 자기에 대한 지식은 삼국시대부터 중국 육조청자(六朝靑磁)의 유입이 상당량에 달하고 있고(일부 백자·흑유자의 유입도 있음.), 8세기부터 성당(盛唐)의 도자기가 들어왔으며, 특히 9세기경부터는 월주지방의 만당도자기(주로 청자와 일부 다른 지방 백자)와 그 기술이 해로(海路)를 통하여 활발하게 우리나라 서해안과 일부 남해안에 많이 유입되어 초기 청자인 이른바 일훈문굽계청자(日暈文─系靑磁 : 햇무리굽청자)와 소량이지만 백자도 만들기에 이르렀으며 뒤이어 녹청자(綠靑磁)도 만들었다.
9세기 전반 동북아 해상무역의 왕자였던 장보고 등의 해상활동에 의하여 중국청자(백자·흑유자도 포함)가 수입되고 청자번조기술이 도입·전파됨으로써 이 일대는 이미 토기를 사용하는 생활문화권에서 벗어나 자기를 사용하는 문화권으로 진입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들 서남해안의 가마에서는 석기에서 청자로 이행되는 초기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환원번조가 잘되고 갑발(匣鉢 : 도자기를 구울 때 재티 등이 자기 표면에 내려앉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도자기를 넣는 개비)을 사용한 본격적인 청자를 번조하기 시작하였고, 일부 백자와 흑유자도 번조하였다.
그 뒤 강진과 부안은 중앙인 개경과 연결되어 관요로 이어져서 이곳 가마가 집중적으로 운영되어 발전하게 되고, 중국 남북방요의 영향을 체계 있게 정리, 이용함으로써 더욱 발전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햇무리굽청자는 양질이었기 때문에 생산비가 높아서 그 소비계층도 지방호족 등 부유한 계층이나 상류계층이었을 것이다. 9세기 무렵 햇무리굽 양질 청자의 수요가 늘어나자 서남해안 일대에는 수많은 가마가 생겼다.
이제까지 발견된 가마만 보아도 북쪽으로부터 황해도 송화군 운유면 주촌리와 봉천군 원산리,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흥동,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 용인시 이동면 서리, 전라북도 진안군 성수면 도통리, 고창군 아산면 용계리, 강진군 대구면 일대와 칠량면, 고흥군 두원면 운대리 등 널리 분포되어 있다. 이들 가마는 규모가 방대하고 모두 갑발을 사용하여 값이 비싼 양질의 청자를 생산하려고 노력한 가마들이다. 청자문화가 이같이 급속히 퍼져나가게 되자 자연히 질이 떨어지는 조질의 값싼 청자가 역시 서남해안 일대에서 생산되어 일반 백성들의 수요에 충당하게 되었다. 이 조질청자는 태토에 모래 등 잡물이 섞이고 번조한 뒤에도 기공(氣孔)이 많은 등 치밀하지 못하고, 유약도 회유와 흡사하여 그 색이 녹갈색을 머금고 있으며 유면(釉面)도 고르지 못하다. 이러한 청자를 녹청자라고 하는데, 이 녹청자요지는 인천광역시 서구 경서동, 충청남도 서산시 성연면 오사리, 보령시 천북면 사호리, 전라남도 함평군 손불면 양재리, 영광군 염산면 오동리, 해남군 산이면 일대 등지에 있으며, 해남군 산이면에는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만도 50개가 넘어 이 시기 청자문화의 급속한 발달을 엿볼 수 있다.
청자의 세련 : 12세기 전반기는 고려청자 중에서도 순청자가 가장 세련되는 시기였다. 청자의 색은 처음부터 환원번조로 시작되었으며, 이미 11세기에는 완벽한 환원번조로 독특한 청자색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12세기 전반기는 그 절정기로서 이 때 청자의 모습은 17대 인종왕릉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는 청자과형화병(靑磁瓜形花甁) 등 일괄유물로 대표된다.
1123년(인종 1) 북송 휘종의 사행의 일원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徐兢)이
고려도경 高麗圖經에서 “근년 이래 제작이 공교(工巧)하며 색택(色澤)이 더욱 아름답다.”라고 한 것이나, 북송말경으로 생각되는 태평노인(太平老人)의 기록인
수중금 袖中錦에 “고려청자의 비색이 천하제일”이라고 지적한 바와 같이 반실투성(半失透性)의 빙렬(氷裂)이 거의 없는 우수한 비색 유약을 완성하였다(1차비색 완성). 비색 유약의 완성과 더불어 기형·문양·번조수법 등에 남아 있던 중국의 영향이 거의 사라지고 자연에서 소재를 얻은 독창적인 형태와 문양이 고려적으로 변형, 발전되며 독특한 세련을 보인다. 이와 같은 청자의 세련은 12세기 중엽까지는 또 다른 의미의 진전을 보여 유약은 반실투성에서 조금씩 더 밝아지고(2차비색 완성), 새롭게 구상된 음각·양각·투각문양 등이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이러한 발전은 고려사 세가 의종 11년(1157)조에 보이는 청자와(靑磁瓦)의 기록과,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 당전마을에 산재한 청자와편(靑磁瓦片)을 반출하는 요지에서 증명이 된다.
12세기 전반 상감 발생기의 청자요지(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 당전마을의 청자기와를 반출하는 요지)에서의 상감문양은 기명(器皿)의 일부에만 사실적인 문양으로 나타나며, 상감이 시문된 위치는 11세기 후반경이나 12세기초경의 기명에 음·양각으로 시문하던 자리의 일부 또는 전면에 나타난다. 이 경우 내외면 중 일면시문으로 문양도 음·양각문과 흡사하다.
이러한 초기 상감상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12세기 중엽인 상감 최성기에 이른다. 처음의 상감문양은 기명의 내측이나, 외측의 일부에 나타나다가 점차 전면에 나타나며 좀더 발전되면 내외면에까지 시문이 확대된다.
문양은 상감 발생 초기의 사실적인 문양에서 도식화되기 시작한다. 그릇의 면을 분할하여 구도를 잡아 주문과 종속문을 구분, 시문하여 상감되는 부위에 따라 새롭게 고안된 여러 가지 문양이 적절히 포치되어, 하나의 일정하고 통일된 구성과 조화를 이루게 된다.
문공유의 묘에서 출토된 청자상감보상당초문완은 바로 상감 최성기의 작품으로, 이러한 완숙한 경지까지 도달하려면 상감 발생기로부터 상당한 시일이 경과하였을 것이며, 따라서 상감의 발생 시기는 12세기 전반인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상감발생기는 상감이 여러 가마에서 고안되어 일반화되는 처음 시기를 말하는 것이며, 특수한 지역 또는 특정한 기형에 예외적 또는 우발적으로 상감이 시문된 예는 12세기 초는 물론이고 11세기 또는 10세기에도 가능할 수 있다. 실제로 경기도 용인시 이동면 서리 백자·청자 가마 발굴 때 10세기를 내려오지 않는 층위에서 서툴지만 특이한 상감을 한 파편이 발견되었고, 전라남도 함평군 손불면 양재리에서도 10세기경 청자가마에서 흑상감 파편이 발견되었다. 그 밖에 11세기로 추정되는 청자에 상감이 들어간 예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우리나라 청자는 12세기 전반에 비색 순청자로서 유례가 없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나타냈고, 12세기 중엽 유약을 맑고 밝게 발전시켜 청자상감으로서 다시 한 번 꽃을 피웠다.
고려자기 중에서는 청자가 특히 세련되고 많이 생산되었다. 토기에서 청자로의 발전이행은 인류문화 발전의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으나, 고려시대의 청자는 그 자연과 시대적 배경에 힘입어 더욱 많이 생산되고 가장 세련되었다.
중국청자가 색이 진하고 유약이 불투명하며 예리하면서 장중한 데 비하여 고려청자는 은은하면서 맑고 명랑한 비색, 유려한 선의 흐름과 탄력이 있고 생동감 있는 형태, 조각도의 힘찬 선, 기물과 일체가 된 회화적이며 시적인 운치가 있는 상감문양 등에 특색이 있으며 또한 세계에서 최초로 자기에 붉은색을 내는 구리의 발색기법을 창안해냈으면서도 한두 점 악센트로만 강한 색 [銅彩發色] 을 쓰면서 모든 색을 담담하게 구사하는 등 언제나 자연과 같이 호흡하고 일체가 되고자 하는 것이 그 특색이다.
고려 말의 타락한 청자는 조선조로 들어오면서 큰 줄기는 분청사기로 이행되고 다른 한 줄기는 조선청자로 그 맥락이 이어진다. 고려청자를 계승한 조선 초기 청자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고려 말 퇴락한 재래의 청자를 계승하였으나 그 질과 기형·문양 등이 조선조의 특질을 조금씩 나타내면서 발전하는 청자이고, 또 하나는 새로운 백자가마에서 새로 만들어내는 청자이다.
재래식 청자는 고려청자의 퇴락한 상태의 말기적 조질 청자에서 약간 발전, 변형되어 질이 향상되고 기형에 생동감이 있으며 문양이 활달해져 초기 분청사기상감과 기형·문양이 거의 같다.
새로운 청자는 백자가마에서 같이 생산되며 백자태토에 청자유약을 입혔고, 기형도 고려청자 기형에서 발달한 것이 아니고 새로운 백자와 거의 같고 음각문양이 있는 것도 있다.
광주 중앙관요 중에 조선 전기의 초기 가마는 광주군 퇴촌면 우산리와 도마리, 중부면 번천리·오전리, 초월면 무갑리 등에 있으며, 전기의 중엽 가마는 퇴촌면 정지리와 관음리 등에 있고, 전기의 말엽 가마는 광주읍 탄벌리, 도척면 상림리, 초월면 선동리 등에 있다.
조선청자는 15세기 중엽까지는 두 가지 계통 모두 질이 양호하고 기형과 문양이 생동감 있고 활달하였으나 15세기 후반부터 고려청자를 계승한 청자는 자취를 감추고 새로운 조선조 청자만이 백자가마에서 소량 생산되었으며 17세기 중엽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강진청자자료박물관, 강진군청 관광개발팀, 강진군 고려청자사업소, (대한민국 구석구석, 2013.6, 한국관광공사), 『고려청자』(고유섭, 을유문화사, 1954), 『간송문화』 6-도예 1(청자)-(한국민족미술연구소, 1974),『한국의 미』-청자-(최순우 감수, 중앙일보사, 1981),『한국청자도요지』(최순우,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2),『고창아산댐 수몰지구발굴조사보고서』(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1985),『국보』-청자·토기-(최순우 편, 예경산업사, 1986),『완도해저유물』(문화재관리국, 1985),『고려청자』(정양모, 통천문화사, 1989),『전남지방도요지조사보고』 Ⅱ(국립광주박물관, 1988),『한국도자사』(강경숙, 일지사, 1989),『인천경서동록청자요지』(정양모, 국립중앙박물관·인천직할시, 1990),『中國陶瓷史』(中國硅酸鹽學會 編, 文物出版社, 1982),『朝鮮總督府調査資料』 18-朝鮮の窯業-(朝鮮總督府, 1926),『朝鮮陶磁史文獻考』(小田省吾, 學藝書院, 1936),『高麗陶器の硏究』(野守健, 淸閑舍, 1944),『改訂古陶磁の科學』(內藤匡, 二玄社, 1962),『陶器講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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