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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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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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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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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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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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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닥종이(한지),닥나무, 꾸지나무, 산닥나무(안피, 雁皮), 삼지닥나무
 


 한지(韓紙, 문화어:조선종이) 또는 닥종이는 한국 고대의 종이로 중국의 제지술을 도입하여 이를 더욱 발전시켰고, 그 품질 또한 매우 우수하였다. 삼지닥나무안피나무닥나무뽕나무등의 수피(樹皮)의 섬유를 뜬 것이다. 용도에 따라 창호지, 복사지, 화선지, 태지로도 분류할 수 있다.
한지는 부채와 연, 바구니, 종이 상자 등을 만들기도 한다.
또한 한지는 외국의 양지보다 훨씬 오래 간다. 외국의 양지는 200년이지만 우리나라의 한지는 그의 1000년이나 더 긴 1200년이나 지속된다. 또한 우리가
쓰는 A4용지보다 질기며,글쓰기와 그림그리기가 매우 잘된다고 한다. 특히, 한지는 옻칠을 할 경우 2100년 까지 간다.
오늘날에도 한지를 많이 만들고 있다. 한지의 멋스러움과 좋은 점을 알고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요즈음에도 한지에 물을 들여 여러 색깔의 한지를 만들기도 한다.
 
진상품관련근거
닥나무. 닥종이[]는 경상도(남해현, 밀양도호부, 醴泉郡, 의령현, 진주목, 청도군, 초계군, 풍기군, 합천군) 전라도(곡성현, 광양현, 구례현, 낙안군, 남원도호부, 담양도호부, 동복현, 무주현, 보성군, 순창군, 옥과현, 용담현, 임실현, 진안현, 함평현, 해남현) 평안도(강동현, 박천군, 삼등현, 상원군, 성천도호부, 안주목, 증산현)에서 대전, 왕대비전, 혜경궁, 중궁전, 세자궁에 진상하였다는 기록이 여지도서, 춘관통고, 공선정례 기록되어있다.
 
한지의 원리
한지의 주원료로는 닥나무( Broussnetia Kazinok Sieb)의 인피섬유가 사용되어왔다. 닥나무는 뽕나무과에 속하며 일반적으로 부르는 명칭은 닥나무와 꾸지나무이다.
이중 닥나무는 우리나라 고유의 품종이지만 꾸지나무( Broussnetia Papyrifera Vent)는 일본으로 부터 들여온 것이다. 그러나 닥나무와 꾸지나무는 오래전부터 구분없이 식재해왔기 때문에 잡다한 유전자를 가진 잡종으로 변해 식별이 어렵다. 꾸지나무는 머구쟁이, 부닥, 개닥이라 부르기도 한다.
-한지의 주원료 : 닥나무, 꾸지나무, 산닥나무(안피, 雁皮), 삼지닥나무 등
-한지의 부원료 : 닥풀(황촉규, 黃蜀葵) 이것은 초지시 초지를 용이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요즘은 PAM 또는 PEO같은 화학점제를 사용한다.
 
한지의 변천사
1) 한지의 기원
고대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종이를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하였는가는 아직 정확히 확인된 바 없지만 우리나라 고대 사회에서 종이가 만들어져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는 중국의 제지술을 도입하여 제지를 더욱 발전 시켰고, 그 품질 또한 매우 우수하였다. 현존하는 최고의 목판 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니경의 종이가 그 증거라 하겠다.
우리나라 종이의 기원 및 전래는 몇가지 설이( 2세기- 7세기 ) 있는데 그 내용을 정리해 보면 아래와 같다.
2세기 설은 현재까지 한지의 주원료인 닥은()"가 중국에서는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2세기 사이에 “tag", 혹은 “tiag"라는 음으로 읽혔다고 한다.
그러므로 닥은()"의 음이"으로 읽혀지고 있던 시기에 종이원료로서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것이다. 이후"이라는 음은 화석화되어 훈()이 되었고, ()“" 6세기 이후 중국의 음이 새롭게 들어온 결과일 것이다.
이같은 사실로 미루어 본다면 2세기 경에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종이나()"를 사용한 제지법이 그 명칭과 함께 전래되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3세기 경 후한말 낙랑시대에 중국으로부터 종이와 종이 만드는 법이 들어 왔다는 설이 있다.
 
첫째: 평남 대동군 남정리 채협총에 근거한다. 서기 1931년 조선 고적연구회 사업으로서 발굴된 후한 말엽의 것으로 추정되는 낙랑시대 고분 채협총에서
권자본(卷子本)의 질통(帙筒)으로 보이는 채문칠권통(彩文漆卷筒)과 묵분(墨粉)이 붙어 있는 벼룻집, 오수전, 화천, 채문칠권통, 동경, 채화칠협 등이 발견됨으로서 당시에 종이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고분의 밀폐된 칠관 속에서 발견된 종이로 보이는 섬유의 꼴이 닥종이가 물에 젖어 덩어리진 것과 같았다고 하여 한대의 종이와 이것이 비슷했을 것이라는 증거로 삼는다. 그러나 이것이 종이인지는 확실치 않다.
 
둘째: 백제는 서기 285년 일본에 천자문을 전해주었는데, 이것은 채륜이 종이를 만든지 180년 뒤로 이미 종이를 만들었으리라 추측된다.
 
셋째: 3세기말부터 4세기말까지 중국 대륙에서 난리를 피해 우리나라로 온 이주민들이 많아 이들 가운데 종이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넷째: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대로 중국에서는 종이가 이미 다른 서사재료를 대치했던 284년에 백제의 아직기(阿直岐)가 일본에 전했다고 하는 [천자문(千字文)]
[논어(論語)] 등이 종이 서적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왕인이 천자문을 전한 것이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채륜의 제지술 발명보다180년이 경과한 후라고 본다면
서기 200년대 후반에는 제지술이 우리나라에 보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위의 사실을 종합해 보면 2세기에서 늦어도 4세기까지는 우리나라에 종이와 그 제조술이 전래되었을 것이다.
4세기 말이라는 견해는 동진의 마라난타가 384년 백제에 불교를 전파하였는데 이때 많은 책과 제지술도 함께 전해졌을 것이란 생각에서 비롯된다.
한반도의 제지술은 불교의 전래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불교 전래시기를 보면 고구려는 소수림왕 2(서기 372) ()의 순도와 아도가 불경과 불상을 가지고 왔다.
백제는 고구려보다 13년 후인 서기 침류왕 원년(384)에 인도 승 마라난타가 진()나라에서 들어와 불교를 펴기 시작하여 계율종, 삼륜종, 성실종의 3종파가
이루어졌다고 하니 이때는 이미 종이가 불경으로서는 일반화되었다고 보인다.
신라는 눌지왕(서기 417~591)연대에 전래된 것으로 보며 법흥왕 14 (서기 527)에 공인되었는데 북방 고구려계와 양진의 남방계가 그 유입 경로라고 한다. 따라서 최소한 이 무렵에는 제각기 종이에 대한 수요 자극과 자체 생산의 열망이 고조되고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6세기말~7세기 설은 다음의 세 가지에 근거한다.
첫째: 6세기에 신라에서 많은 유학생과 승려가 당으로 유학을 가는 등 교류가 많아 먹, , 종이 만드는 법이 전해졌을 것이다.
 
둘째: 불국사의 석가탑에서 다른 유물과 함께 나온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두루마리는 석가탑을 창건할 751년에 넣은 것으로 사려되므로 이때 종이 만드는 기술이 있었을 것이다.
 
셋째: 610년 고구려의 담징이 일본에 채색, 종이, , 연자방아 등 만드는 방법을 전해주었다는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이다. 이 시기에 중국에서는 맷돌 등을
이용하여 섬유를 잘게 갈아 종이를 만들었고, 담징이 함께 전했다고 하는 맷돌은 종이와 관련 용구로 추측된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제지에도 맷돌을 사용하였을 것이고, 이로 우리나라의 제지법이 중국의 종이 기술과 동일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이 기록은 610년 전후가 우리나라 한지(韓紙)와 중국의 화지(華紙)가 구별되는 시기라는 점도 시사한다. 우리나라의 현존하는 8세기 이후의 종이는 중국처럼 섬유를 잘게 갈아서 만든 종이가 아니고 두드려서 종이를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평양에 소장되어 있는 우리나라 종이로서 가장 오래된 고구려의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 섬유를 자르지 않고 두드려서 고해(叩解)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보다 후대의 종이 [법화경]의 품질이 매우 우수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7세기 이전에 이미 상당한 기술의 축적이 이루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7세기 초 이전에 우리나라에서 제지가 이루어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기술은 상당한 경지에 도달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제지술은 그 훨씬 이전 중국의 것을 모방하던 시기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2) 삼국시대
삼국시대는 한지의 태동기라 할 수 있다. 적어도 이 시기 이전에 종이와 그 제조술이 전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 둘어온 종이와 그 제조법은 상당기간
동안 중국의 그것을 모방하였으나 이때부터는 우리의 한지를 이룬다.
삼국시대의 고분 구조상의 결격으로 인해 식물질의 보존이 나빴기 때문에 제지기술에 대해 알 수 있는 문헌자료나 고지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우리나라에
제지술과 종이가 2세기경부터 7세기 사이에 전해진 것으로 생각할 때 북방과 남방은 서로 다른 경로에 의하여 전해진 것으로 생각된다. 함경도 지방 이북은
추워서 닥을 재배하기 마땅치 않지만 마포(麻布)는 비교적 용이하게 얻을 수 있고, 남쪽의 경우에는 대부분이 닥 재배 적지로서 원료 조달에 문제가 없으며 품질 또한
좋기 때문에 고구려는 낙랑으로부터 주로 마()를 사용하는 방법을, 백제는 닥()을 사용하는 제법을 중국의 남부지방으로부터 전해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중국에서도 교주(交州) 등 남부 지방에서는 닥나무를 이용하여 종이를 만들고 있었다고 한다.
고구려나 백제 신라 모두 제지의 중심지는 수도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의 수요 계층도 수도와 인근의 귀족층 이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구려나 백제의 종이와
그 제지법에 관한 자료는 찾아볼 수 없으나 중국의 문헌에서 신라 수도 경주를 의미하는 계림의 종이의 우수성에 대하여 언급한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일본에 제지법을 전한 사람은 고구려의 승 담징으로 때는 서기 610년 신라 진평왕 32, 고구려 영양왕 21, 일본 추고천황 18년 이다. 이것으로 7세기 경을
우리나라에서 제지술이 일반화된 시대라고 해석할 수 있다.
 
3) 통일신라시대
제지 중심지는 경주 지방으로서 여기서 생산하는 종이가 관용지의 수요를 충당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백추지가 국내외에 유명지종으로 알려져 있다.
세계 최고의 목판인쇄물인 국보 196호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陀羅尼經)의 용지는 서기751년 이전의 닥종이임이 고증되어 있으며 지질과 인쇄술로 일본을 압도하고 있다.
755년 사성(寫成)된 백지묵서화엄경(白紙墨書華嚴經) 8세기 중반의 것으로 고해나 정선이 상당히 잘 되어 있고 표백 상태도 매우 좋아 대단히 발전된
기술을 지닌 기술자가 정성들여 만든 종이임을 알 수 있다. 이들 종이는 긴 섬유를 두들이는 고해를 하여 만든 한지이며 중국의 것처럼 섬유를 잘게 갈아서 만든 종이는 아니다. 경주의 고분에서 출토된 관의 옷칠 내장용 종이의 정교함으로도 당시의 종이를 짐작할 수 있다.
 
 
4) 고려시대
고려시대는 우리종이의 발전기였다. 삼국시대 각 국의 우수한 문화적 역량은 한반도 최초의 통일왕조인 고려가 세워짐으로써 보다 발전하게 되었다.
이 시기는 본격적으로 원료, 생산자, 생산지에 대한 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하였다. 불교가 성행한 당시 사회, 문화적 배경으로 인하여 사경이 많았고
여러 겹을 붙인 종이가 많았다. 따라서 두껍고 질기며 광택있는 종이를 선호하였고 이에 적합한 닥나무를 수급하기 위하여 국가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지리적 조건이 좋은 지방에 지소를 설치했고 이곳을 중심으로 갖가지 원료를 사용한 특색있는 종이가 만들어졌다. 종이에 다듬이질을 했고 노란색이나
감색으로 염색을 한 가공지가 많았다. 고려지는 견인하고 광택이 나고 희었다.
11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확대된 불경 조판사업으로 종이 생산기술은 크게 발달하였으며, 국가에서도 이들 종이 생산 기술자들을 지장(紙匠)이라는 명칭을 주었고,
이들을 모아 집단으로 구성케하여 이들의 기술을 한층 더 높일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 주었다.
 
5) 조선시대
조선조 전기는 우리나라 제지술의 완성기이다. 통제기관의 설치, 원료와 기술의 다양화, 용도의 대중화 등으로 표현될 수 있는 중요한 시기이다. 문물제도
개혁과 문화적 관심으로 태종 때 국영 조지소를 설치하여 관영화하였고, 닥으로 만든 돈인 저화제도의 정착에 고심하는 등 제지공업의 중흥에 진력하기 시작했다.
세종때 조지소를 조지서로 개칭하여 역대 왕은 이 조지서를 통하여 당시 급격한 수요증대에 따른 원료의 조달, 종이의 규격화, 그리고 품질 개량을 연구도모하였다.
수공업 중 제지생산은 가장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외장 중 지장수의 비율이 높았던 것으로 제지업의 비중이 상당히 높았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부터 제지된 것으로 보이는 태지가 본격적으로 초조되었고, 미려한 종이를 만드는 노력이 관민 모두에 의하여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종이는 그 용도가 많아 우리나라의 전국에 걸쳐 생산되었다.
후기는 우리나라 제지술의 쇠퇴기라 할 수 있다. 초기의 종이 품질은 고려조의 성가를 이어받아 세종시대까지는 손색이 없었고 부분적으로는
그 이후까지도 품질에 대한 신뢰도가 지속되었다. 그러나 세종조 이후의 종이 생산의 관영화와 적극적인 증산책은 초기에는 발전하는 듯 하였으나
폭발하는 수요, 청대로 이어지는 혹독한 조공지에 대한 압력, 여러차례 전란으로 점차 자발적인 창조성이 위축되고 획일화된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닥원료의 부족으로 짚보리갈대 등의 부원료 혼합으로 품질은 저하되었다. 제지술의 전통은 임진란을 기점으로 서서히 하향의 길을 걷게 되었다. 대소의 연이은 환난은
국가 재정의 파탄을 가져오고, 바닥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하여 지장에 대한 보호 육성없이 혹사시켜 훌륭한 제지술의 전통은 기술적 퇴보를 자초했다.
말기에 이르면 태지 정도를 제외하고는 우리의 가공지는 거의 없이 중국과 일본의 종이가 수입되어 많이 유통된 것으로 보인다
 
출처 및 참고문헌
국가기록유산, 여지도서, 춘관통고, 공선정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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