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태가 동해안을 대표하는 어종(魚種)이라면, 서해안에서 첫 손꼽히는 물고기는 조기다. 명태가 설악의 매서운 바람을 맞으며 황태가 되는 것처럼, 조기는 칠산바다의 다습한 해풍에 의해 굴비가 된다. 덕장에 몸을 내맡기는 것도 엇비슷하고, 어느 한 곳 버릴 게 없는 생선이라는 점도 같다.
명태의 어획고가 동해안의 지역 경기를 좌우했듯이, 흑산을 거쳐 전북 위도·경기 연평도·평북 대화도 근해까지를 아우르는 서해 연안의 삶은 조기와 맞물려 있었다. 조기의 회유로를 쫓아 위도와 연평 파시가 서고, 숱한 물새와 상인들도 몰려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송수권 시인은 이 둘의 유사성을 빗대 이렇게 노래했다.
굴비 한 두름은 스무 마린데 북어 한 쾌도 스무 마리다 / 큰 것은 열 마리다. 남쪽은 보리가 익는데 조기철이고 / 북쪽은 눈이 내리는데 명태철이다 / 칠산바다에 봄바람이 불면 너는 오고 / 주문진 속초항에 눈이 오면 나는 간다 / 나는 생태탕이 그리워 가고 / 너는 생조기탕이 그리워 온다. // 맛따라 오고 간다. 눈따라 오고 가고 / 바람따라 오고 간다 / 이 미친 풍토병 때문에 나는 굴비 한 두름 꿰차고 올라가고 / 너는 북어 한 쾌 꿰차고 내려온다 / 올라가고 내려온다. //… (송수권, ‘황태나 굴비 사려‘)
하지만 나는 우리 바닷고기중 조기를 으뜸으로 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제상에 올라가고 나랏님 진상품이었다고 해서 명태와 조기를 같은 반열에 올려놓는 것도 참을 수 없다. 나무 주걱이 쇠 주걱 될 수 없듯, 본디 ‘째비‘(급)가 다른 것을 어찌하랴. 기름진 조기를 담백한 명태와 견줄 수 없고, 푸석한 황태를 굴비의 깊은 맛에 비견할 바 아니다. 황태 상품 한 쾌가 5만원 내외라면, 굴비 한 두름은 그 열 배를 넘지 않는가.
전라도 지방의 옛날 뱃노래에는 “돈 실로 가자 돈 실로 가자 칠산 바다에 돈 실로 가자”는 노랫소리가 실려 있다. 이 돈은 물론 조기를 말한다. 매년 진달래꽃 필 무렵이면 법성포에는 커다란 조기 파시가 형성되어 나라 안의 작부는 다 모이고 강아지도 돈을 물고 다녔다는 말이 전설처럼 전한다.
요즘 칠산 바다에서는 조기가 거의 잡히지 않는다. 조기는 제주도 서남방과 상해 동쪽의 따뜻한 바다에서 월동을 하고, 3월 하순에서 4월 중순에 영광 법성포의 칠산 바다를 거쳐 4월 하순에서 5월 중순 사이에 연평도에 닿고 6월 상순에는 압록강 대화도 근처에까지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조기의 회유는 추자도 근방에서 머물고 그 위로 올라오는 양은 극히 적다. 추자도 근방에서 다 잡아버려 그 위로 올라오는 양이 적다는 말도 있다.
칠산 바다에 조기가 사라졌지만 법성포에는 조기가 넘쳐난다. 목포, 추자도 등 남쪽에서 들여온 조기로 말린 것들이다. 법성포 굴비는 더 이상 ‘법성포의 조기’로 말려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법성포 굴비의 명성은 여전하다. 아니 오히려 그 명성은 더 높아만 가는 듯하다. 1980년대 말까지만 하더라도 법성포에는 굴비를 생산하고 판매하는 업체가 28곳밖에 없었는데 현재는 400여 곳에 이르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진상품관련근거
조기[石首魚], 참조기알젓(黃石秀魚卵醢), 참조기(黃石秀魚), 산참조기(生石首魚)가 경기도(교동현, 남양도호부, 부평도호부, 수원도호부, 안산군, 인천도호부, 통진현, 풍덕군, 강화도호부, 남양도호부, 수원도호부, 안산군, 인천도호부) 경상도(熊川縣, 사천현, 거제현, 고성현, 곤양군, 남해현, 진주목, 진해현, 창원도호부, 칠원현, 하동현) 전라도(고부군, 만경현, 부안현, 옥구현, 흥덕현, 무장현, 영광군, 함평현, 광양현, 순천도호부) 충청도(결성현, 남포현, 당진현, 면천군, 보령현, 부여현, 비인현, 서산군, 서천군, 석성현, 신창현, 아산현, 임천군, 천안군, 태안군, 한산군, 해미현, 홍주목, 직산현) 평안도(곽산군, 삼화현, 선천군, 숙천도호부, 영유현, 용강현, 용천군, 정주목, 증산현, 철산군, 함종현) 황해도(강령현, 옹진현, 해주목)에서 대전, 왕대비전, 혜경궁, 중궁전, 세자궁에 진상하였다는 기록이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춘관통고, 공선정례에 기록되어있고 청와대에 공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조기[石首魚] 간하는 법과 바람이 다르다
칠산 바다에서 조기가 잡히지 않는다, 그래서 법성포 굴비는 타지역 조기로 말려진다는 사실은, 법성포 굴비의 명성에 흠집 나는 일이 아님을 법성포 사람들은 주장한다. 웬만한 사람들은 이제 칠산 바다에 조기 씨가 말랐다는 것을 다 알고 있으며, 그래도 법성포 굴비가 맛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칠산 바다 조기나, 제주 바다 조기나, 연평도 바다 조기나 그 맛이 다 같고, 어디서 그 조기를 말리느냐에 따라 굴비 맛이 달라지며 그 맛의 차이를 소비자들도 인정하는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법성포 굴비가 맛있는 까닭은 첫째 염장법이 독특하다는 데 있다. 1년 넘게 보관하여 간수가 빠진 천일염으로 조기를 켜켜이 잰다. 천일염은 같은 군내 염산면의 염전 것을 쓴다. 이 염장법은 손이 많이 가고 조기의 크기에 따라 간하는 시간을 조절하는 일이 까다롭다. 법성포에서는 이를 섶장이라 부르며 외지인에게는 그 소상한 방법을 알려주지 않는다. 소금물에다 조기를 담갔다가 말리는 타지역의 굴비를 법성포 사람들은 ‘물굴비’라 하여 하품 취급한다. 법성포 굴비가 맛있는 둘째 까닭은 법성포의 기후 조건에 있다. 봄부터 여름 사이 법성포의 습도와 일조량은 굴비 말리는 데 적절하다는 것이다. 특히 ‘굴비는 바람에 말린다’고 할 만큼 바람이 중요한데, 이 무렵 법성포에서는 바다 쪽에서 북서풍이 불어 굴비 말리는 데 더없이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사라져가는 옛날 굴비
굴비는 시대가 변함에 따라 건조 방법이나 맛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굴비는 원래 북어처럼 바싹 말린 것을 말하였다. 조기를 봄에 잡으므로 소금을 듬뿍 넣어 바싹 말리지 않으면 쉬 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기를 소금에 사나흘 절여 이슬을 피해가며 보름 넘게 말렸다. 이렇게 바싹 말리면 살이 딱딱하게 굳는다. 꼬리 부분을 잡고 찢으면 북어포처럼 일어나는 정도 되어야 굴비라고 하였다. 이를 통보리 뒤주 속에 넣어 보관하기도 하였는데, 뒤주 안이 서늘한데다 보리의 겉겨가 굴비의 기름을 잡아 오래 보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굴비는 이렇게 말리지 않는다. 소금 간을 하고 꾸덕하게 말린 정도의 것을 굴비라고 한다. 예전에는 이를 간조기라 하였다. 굴비가 이렇게 변하게 된 것은 냉장시설의 발달 ‘덕분’이다. 지금의 굴비는 물기가 많아 상온에 두면 변하기 마련인데 이를 냉장유통을 하고 집에서도 냉장고에 보관을 하면서 상하는 일이 없게 되었고, 어느 틈에 간조기가 굴비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옛날 굴비가 점차 사라지면서 굴비의 참맛을 아는 사람들도 사라지고 있다. 굴비는 여름에 먹어야 맛있다. 초여름 낮밥으로 대청에 상을 펴고 쪽쪽 찢은 굴비에 참기름 두른 고추장을 곁들여 내는 것이다. 이때는 찬물에 만 밥만 있으면 된다. 늦여름 저녁에는 쌀뜨물에 불린 굴비를 시루에 슬쩍 찌거나 국물 자작자작하게 해서 지져 내는 것이다. 요즘 굴비라 부르는 간조기와는 맛에서 크게 다르다.
법성포 굴비의 내용
산란 직전의 조기를 잡아 소금으로 간을 하여 말린다. 동지나해역에서 월동한 조기떼가 산란하기 위하여 연평도 근해까지 북상한다.
법성포 앞 칠산바다에서는 4∼5월경 특히 곡우사리 때 알이 차고 맛이 좋은 산란 직전의 조기를 잡을 수 있다. 고려 인종 때 처음으로 진상되었으며, 명·청나라에까지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일설로는 법성포에 귀양온 이자겸이 비굴하게 살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그 맛이 변하지 않는 영광굴비를 진상하면서 ‘비굴’의 글자를 바꾸어 ‘굴비’ 라고 하였다고 한다.
굴비 만드는 법은 토굴 속에 조기 한마리씩을 소금에 절여 3일간 돌로 눌러 놓았다가 물이 빠지면 열마리를 한두름으로 엮어 걸대에 걸어 7∼14일 동안 해풍에 건조시킨다.
돌로 눌렀기 때문에 석수어(石水魚)라고도 하였다. 최근에는 어획량이 적어서, 영광굴비의 전통은 법성포의 약 40가구에 의하여 겨우 명맥만이 유지되고 있다.
갈재의 서쪽에 자리한 지역이 영광, 함평, 무안이고 남쪽이 장성군과 나주시인데, 영광을 일컬어 옥당고을이라고 부른다. “아들을 낳아 원님으로 보내려면 남쪽의 옥당골이나 북쪽의 안악골로 보내라”라는 옛말에 나오는 옥당골은 지금의 영광을 말하고, 안악골은 지금의 황해도 안악군 일대를 말한다. 이런 말이 나오게 된 이유는 들이 넓을뿐더러 바다가 가까워서 바다에서 얻는 이익이 많았기 때문이다.
『택리지』에 “영광 법성포는 밀물 때가 되면 포구 바로 앞에까지 물이 돌아서 호수와 산이 아름답고, 민가의 집들이 빗살처럼 촘촘하여 사람들이 작은 서호(西湖)라고 부른다.
바다에 가까운 여러 고을은 모두 여기에다 창고를 설치하고 세미(稅米)를 거두었다가 배로 실어 나르는 장소로 삼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법성포는 옛날 진나라의 승려 마라난타가 백제 땅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곳이라고 전해오는 포구다.
고려 때 이자겸은 스스로 왕이 되려고 난을 일으켰다가 부하 척준경의 배반으로 실패하고 법성포로 귀양을 왔다.
그때 이자겸은 칠산 바다에서 삼태기로 건질 만큼 많이 잡혔던 영광 굴비를 석어라는 이름을 붙여 사위였던 인종에게 진상했다고 한다.
법성포항법성포는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전라도 제일의 포구였다. 고깃배 선단이 포구에 들어오면 법성포 외양에 있던 목넹기에 파시가 섰다.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의 어물상들이 떼 지어 물려와 북새통을 이루었다.
법성포는 조선시대에 영산포와 더불어 호남지방의 세곡을 갈무리했던 조창 기능을 하였다. 그 무렵 조창의 중심 역할을 했던 나주와 영산포가 뱃길이 멀고 험하여 배가 자주 뒤집히자 중종 7년에 영산포 조창을 없애고 법성포로 옮겼다. 그때부터 법성포에는 광주, 옥과, 동복, 남평, 창평, 곡성, 화순, 순창, 담양, 정읍을 비롯한 전라도 일대 12개 고을의 토지세인 전세(田稅)가 들어왔다.
동헌을 비롯한 관아 건물 15채가 들어섰고, 배가 20척에서 50척까지, 전선이 22척, 수군 1,700여 명이 머물렀다.이처럼 법성포는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전라도 제일의 포구였다. 고깃배 선단이 포구에 들어오면 법성포 외양에 있던 목넹기에 파시(波市)가 섰다.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의 어물상들이 떼 지어 물려와 북새통을 이루었고 가을 세곡을 받을 때는 큰 도회지를 연상케 했다. 그러나 이제 법성포는 회상 속에나 등장할 뿐이고, 화려했던 모습은 옛이야기 속의 한 토막이 되었다.
온 나라에 이름이 나도록 떼를 지어 몰려들었던 조기가 수심이 얕아진 후로는 가뭄에 콩 나듯 드문드문 나타나고, 다른 운송수단의 발달로 포구의 기능은 쇠퇴하고 말았다. 파시 때마다 흥청거리던 법성포의 영광은 언제 다시 올 것인지 기약이 없다. 홍농면에 자리한 원자력발전소의 그늘에 가려 빛을 잃어가는 법성포에는 어느 바다에서 잡혔는지도 모르는 조기들이 걸려 있다. ‘영광 굴비’ 또는 ‘이자겸 굴비’라고 쓰인 간판들을 보아야 비로소 이곳이 바로 굴비의 고장인 영광이라는 걸 알게 된다.이곳의 조기를 굴비라고 부르게 된 것은 고려 인종 때 인종의 외조부이면서 장인이었던 이자겸 때문이다. 사위를 몰아내고 스스로 임금이 되려고 했던 이자겸은 난을 일으켰다가 부하인 척준경이 배반하여 이곳 법성포로 귀양을 왔다.
그는 맛이 빼어나게 좋은 영광 굴비를 ‘석어’라는 이름으로 임금께 진상하였다.
석어라는 이름은 조기를 소금에 절여서 토굴에다 한 마리씩 돌로 눌러놓았다가 하룻밤을 지낸 뒤에 꺼내어 말렸기 때문에 붙인 것이고, 굴비라는 이름은 비겁하게 굴하지 않겠다는 뜻에서 붙인 것이라고 한다. 나라 안에서 영광 굴비를 최고로 치는 것은 이곳에서는 통통히 알이 밴 오사리 때 조기를 잡아서 말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다른 지방과 다르게 ‘섭 간장’ 방법으로 조기를 말려 굴비를 만들기 때문이다. 영광굴비칠산바다에서 잡히는 영광 굴비를 최고로 치는 것은 이곳에서는 통통히 알이 밴 오사리 때 조기를 잡아서 말리기 때문이다. 알이 통통하게 밴 조기를 소금물로 씻은 다음 사흘 동안에 걸쳐 절이는데 그때 맨 밑에다 가마니를 깔고 그 위에 조기, 소금, 조기의 순서로 차곡차곡 쟁여놓은 다음 맨 위에 다시 가마니를 덮어놓고 묶는다. 이때 소금은 하얗고 고운 것을 써야 한다. 이렇게 사흘 동안 절여두었다가 알맞게 절여지면 다섯 마리씩 엮어서 걸대에 걸어놓고 2주일쯤 햇볕에 말린 뒤 통보리 속에 묻어서 저장한다. 이것이 예전 이 지역에서 만들었던 ‘오사리 굴비’인데 이 굴비가 사라진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조기의 성분과 효능
조기에는 단백질 19.5 g , 철분 2.0 mg, 칼슘 23 mg , 인 180 mg, 비타민B1 0.04 mg, 비타민B2 0.39 mg, 비타민A 99 IU, 회분 1.4 g, 지방 0.6g, 니아신 8.7 mg 이 함유되어 있다. 특히 육질이 부드럽고 단백해서 맛이 좋을 뿐만 아니라 양질의 단백질이 풍부한 영양 식품이다. 또한 지방질이 적어 소화가 잘 되므로 성장기의 어린이나 노인에게 좋고, 비타민 A와 D도 풍부해 야맹증 예방에 도움을 주며 몸이 쇠약해졌을 때 먹으면 기력을 되찾을 수 있다.
1. 피로회복, 원기회복
조기에는 단백질, 철분, 무기질, 비타민A와 비타민D가 풍부하게 함유하고 있어 피로회복이나 원기회복에 좋다. 조기라 불리는 이름자체가 기운을 북돋아 준다는데서 지어진 것이다
2. 야맹증예방
조기에는 양질의 단백질과 비타민A, 비타민D가 눈을 좋게 하여 시력회복이나 야맹증 예방에도 효과가 있다.
3. 성장발육 및 골다공증예방
조기의 성분에는 단백질과 칼슘, 철분이 다량으로 함유되어있어 성장기의 어린아이들의 발육에는 물론, 노인분들의 골다공증 예방 등에도 좋다
4. 요로결석예방
굴비는 전립선을 강화시켜 소변을 원활하게 해주어 요도의 결석을 배출해주는 효능이 있다.
5. 식체, 기체
굴비는 위에 매우 유익하여 음식을 먹고 체했을 때, 기가 허해 발생하는 신경성 위장병 치료에 좋다.
위도와 연평 파시 유명
조기는 농어목 민어과에 속한 어족이다. 수심 40~160m의 모래바닥이나 뻘 지대에서 살며 새우·멸치를 비롯한 작은 어류와 동물성 플랑크톤을 좋아한다. 몸길이는 1년만에 15㎝까지 크고, 5년이면 전장 40㎝에 달한다. 한국 연안에서 잡히는 것은 5속 13종으로 민태·꽃조기·참조기·보구치·수조기·부세(富世)·강달어(江達魚) 등이 알려져 있으며, 머리 속에 단단한 뼈가 있다고 해서 석어(石魚) 또는 석수어(石首魚)라고 불렀다. 참조기는 노랑조기 또는 황조기라 하는데, 산모의 미역국을 끓이거나 병약자를 위해 죽을 쑤어 기운을 돋군다(助氣)는 데서 비롯됐다. 단백질·탄수화물·무기질 등이 풍부하며 허준의 『동의보감』엔 ‘뱃속에 탈이 생겨 팽팽하게 부어오르는 복창이나 설사, 체하거나 신경성 위장병에 특효가 있다‘고 기술돼 있다. 몸의 특징은 등 쪽이 회색을 띤 황금색이고 입술은 붉은 색을 띠고 있다. 아래턱은 위턱보다 조금 길다. 배 옆 상단에 하얀색의 선이 있고 꼬리가 두툼하고 짧다는 점에서 부서(부세)와 차이가 난다. 심보 나쁜 상인들은 황숭어리(영광 법성)·황실이(목포)·황세기(충남 아산) 등의 방언을 갖고 있는 강달어(깡달이)를 조기새끼라고 팔기도 하나, 일반인들이 구분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조기떼는 제주도 남서쪽에서 겨울을 나고 2월이면 서해안을 따라 북상한다. 신혼여행을 떠난 이들은 3월경 칠산바다에 이르러 산란을 시작, 5~6월엔 연평도와 대화도 근해에서 종족번식의 대장정을 마쳤다. 칠산어민들은 법성포 건너편 구수산(九岫山)의 철쭉이 떨어지거나, 위도 시도리 늙은 살구나무에 꽃이 피면 참조기가 알을 슬 때라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양력 4월20일 곡우(穀雨)면 어김없이 나타났는데, 약속을 못 지키는 사람에게 ‘조구만도 못한 놈‘이라고 퍼붓던 욕은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어부들은 구멍이 뚫린 대통(竹筒)을 바닷물에 넣어 조기떼의 울음소리를 듣고 고기잡이를 나갔다고 했다. 무리를 찾는 울음은 숲 속을 지나는 바람소리나 비오는 여름날 개구리떼가 합창하는 소리와 비슷하고, 잠을 설칠 정도여서 염불파어(念佛婆魚)로 통했다. 부레를 신축시켜 ‘구- 구-‘ 등의 높고 큰 소리를 내는데, 산란장을 들고나는 무리끼리의 신호음이라고 학자들은 설명하고 있다.(정문기, 어류박물지)
“신경성 위장병에 특효“
우리는 소흑산도 연안에서 위도까지, 조기잡이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동지나해에서 조업 중이던 배들이 만선을 누렸다는 소식이 들렸기 때문이다. 목포 선적 유자망 35t급,제707 복령호와 57t급 ,제808 복령호의 선주인 장덕봉(55)덕언씨(43) 형제가 며칠 전 2억 원 이상을 올렸다는 것, 지난 3년 동안에 최고라는 뉴스였다. 목포 수협에 전화를 걸었더니 판매과 정승환씨(34)도 “척당 평균 위판고가 삼천 만원으로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라고 말했다. 시세도 좋아 90마리 한 궤짝은 90~130만원, 150마리는 22~29만원 대에 거래되고 있다고 일러줬다..
<굴비를 해풍에 말리는 걸대> 옛날엔 소나무로 만들었으나 점차 사라지는 추세다.
어장에 도착하면 정조를 전후 물이 약하게 흐를 때 닻을 내리고 배잡이줄로 조류 방향과 엇갈리게 배를 가로로 정박시킨다. 이어 반대편 우현에서 자루그물과 범포 전개장치를 내리고 걸이줄·고팡줄·돋움줄·부표를 차례로 던진 후 투망한다. 어선 한 척이 대개 세 통의 그물을 사용하는데, 한 장소에서 자루그물만 하루 서너 번 양망한다. 조류가 빠른 서물부터 열한물까지 그물을 던졌다가 조금 이삼일 전부터 귀항하고 있다. 유자망은 이와 반대로 여섯물 때 출어해 물심이 되살아나기 시작하는 두물이나 서물 때 들어온다고 한다. 참조기를 잡는 유자망은 30~50t급으로 300폭 내외의 어구를 사용하는 게 일반적이다. 해가 뜨기 약 두 시간 전, 수심에 따라 부표줄을 조정하고 해류를 따라 느리게 달리면서 선수 오른쪽에서 투망한다. 그물은 해가 진 후 끌어올리는데 양망에만 6~8시간이 걸린다.(국립수산진흥원,『현대 한국어구도감』)
안강망이든 유자망이든, 조기잡이 어선에는 10여 명이 승선한다. 한번 출어하면 최소 일주일 이상 파도와 싸우며 생활한다. 선원들이 거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서낭 모실 생각 말라‘는 속담은 고생하는 뱃사람을 잘 대우하라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선주들도 나름대로 고충이 많다. 출어비를 건지지 못할 때가 많고, 선원들 구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사리선원‘이라 해서 보름 후 다른 배로 훌훌 떠나버리는 뜨내기들이 많다. 위판액을 4:6제로 나눠 갖지만, “미리 선수금만 받고 달아나 버리는 사람도 부지기수“라고 해경 관계자는 말했다.
한달에 보름 정도 조업
그렇다면 서해안의 조기잡이는 언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을까? 정문기 박사는 거금 350여년 전 임경업(林慶業) 장군이 연평도에서 처음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조선 인조 때 명나라와 합세해 청을 공략하자는 밀서가 탄로나자 장군은 백미 10섬과 고사 등을 배에 싣고 화주승의 매곡선(買穀船)으로 속인 후 삼포(麻浦)를 떠났다. 지난 1643년 5월21일 이었다. 연평도에 들러 식수와 반찬을 보충하고, 산에서 엄나무를 베다가 어살(魚箭)을 질러 놓았더니, 다음날 아침 수천 마리의 조기가 발에 걸렸다. 이를 소금에 절여 가지고 배에 실은 후 중국으로 건너갔다. 이후 조기잡이 어부들은 연평도에 있는 장군의 사당을 참배하고 풍어를 기원하는 풍습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듯, 초대 지도군수를 지냈던 오횡묵(1833~?)이 기록한 정무일지(智島郡叢刷錄:1885.2~1887.5)에도 ‘본래 칠산어장은 바다 폭이 백여 리나 되어 팔도의 어선들이 몰려온다. 그물을 치고 고기를 잡는 배가 근 백여 척이 되며 상선 또한 왕래하여 거의 수천 척이 된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그가 ‘어장이 형성된지 오래지 않고…‘라 적고 있는 점. 이로 미루어 볼 때 조기잡이는 조선 후기에 와서야 본격적인 틀을 가지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기를 매개체로 한 서해 연안민의 삶은 근자에 들어와 민속학자인 주강현 교수(경희대)에 의해 체계적으로 정리됐다. 우리 문화의 수수께끼를 좇아온 그가, 오로지 조기만을 주제로 한 권의 책을 펴낸 것이다. '황금투구를 쓴 조기를 기다리며'라는 부제가 붙은 이 보고서엔 흑산도에서 출정식을 갖는 여정에서부터 법성포·천수만·연평도·대화도로 이어지는 조기의 연대기를 통해 띠배·풍어굿·어살 등의 풍속과 임경업 장군의 신화가 집대성 돼있다. 그가 채록한 일부분을 들추면서 옛날 조기잡이 시절로 여행을 떠나보자. 칠산어민들은 조기를 잡으면 기를 올렸다. ‘우리 배에는 조기가 있다‘는 신호였다. 법성포와 함평의 죽포 수랑개에 있는 객주와 인천·군산·강경·목포 등지의 상고선들이 조기를 사들였다. 조기는 1천 마리가 한 동이며 1950년대를 기준으로 쌀 세 가마니 값이었다. 배 한 척이 하루에 많이 잡으면 열 동까지 잡았다. 고깃배들은 대략 70여 일동안 조기를 잡았기 때문에 쌀과 물이 떨어지면 위도로 가서 공급받았다. 보리가 피는 망종까지 꼼짝없이 배에서 살면서 고기를 잡느라고 이발은커녕 목욕도 하지 못하여 이가 득실득실 하였다. 풍선은 돛대 3개를 달고 노 3개로 저었다. 물과 나무, 양식을 싣고 누룩을 많이 넣어서 진하게 빚은 농주를 도가니에 넣어 3~4개씩 싣고 다녔다. 조기는 초저녁과 날샐 무렵에 잡았다. 그물은 긴 것이 900여 발, 즉 1300여 미터 길이며 투망이라 불렀다. 붉은 등을 내걸은 조깃배가 닻을 내리고 기다리는 동안 흡사 연등놀이를 하듯이 밤바다는 환해졌다. 그물은 집에서 직접 면실을 사다가 손으로 꼬아서 들기름을 먹여 만들었다. 닻줄조차도 칡순으로 만들어 썼다. 조기가 잡히는 봄철, 자그마한 포구마을은 돈을 푸대에 퍼담을 정도로 흥청거렸고 색주집도 즐비하게 늘어서 뱃동서들을 유혹하였다.… (주강현, 조기에 관한 명상)
‘오가재비‘가 최상품
이렇게 잡은 조기는 영광 법성포에서 굴비로 되살아났다. 칠산바다에서 수천 동씩 잡는 물량을 소비할 수 없어 장기 저장법의 하나로 소금에 절여졌던 것이다. 속설엔 고려조 인종 때 이자겸이 법성포로 귀양왔을 때 어떠한 불의에도 굴함이 없이 비겁하지 않겠다는 뜻에서 굴비(屈非)라 이름지었다고 전한다. 고래로 ‘밥도둑님‘이란 별명을 갖고 있는 영광 굴비의 맛은 독특한 건조법에 있다. 굴비 중에서도 오사리에 잡은 ‘오가재비‘가 알이 실하고 맛깔나 궁중에 진상됐다.
염장법은 일년 넘게 보관하여 간수가 완전히 빠진 천일염으로 조기를 서른 시간 남짓 켜켜이 재죠. 이것이 섭간이요. 손이 많이 가고 조기의 크기에 따라 간하는 시간을 조절하는 일이 무척 까다롭습니다. 다른 지역에서는 물간 또는 물굴비라고 해서 소금물에다 조기를 담갔다가 말리는데 맛이 틀려요.“
천일염 중에서도 가을에 생산된 것(니가리 소금)은 쓴맛이 나 한여름에 나온 것만 사용했다. 생조기를 재운 후엔 염도가 옅은 깨끗한 염수에 4~5회 씻은 후 크기에 따라 열 마리나 스무 마리씩 짚으로 엮어 높은 걸대에서 해풍에 7~14일 말렸다. 걸대는 소나무 통나무 수십 개를 가지고 밑은 넓고 위는 좁게 만든 삼각형태로, 구멍이 뚫려 하늘이 보이도록 했다. 높이는 4간, 폭은 약 6간으로 한 번에 7만여 마리를 횡목에 매달았다. 인부들은 덕장 밑바닥에 둥근 구덩이를 파고 숯불을 피우면서 고기를 굽고 술을 마시면서 밤을 새웠다. 이걸 야박이라 했는데, 밤새 추위를 잊으며 굴비를 지켰던 것이다.
상인들은 법성포의 기후 조건에서도 영광 굴비의 특징을 찾았다. 봄부터 여름까지 이 지역에 불어오는 바람은 편서풍으로, 습도가 낮에는 45% 이하로 떨어졌다가 밤에는 95% 이상 대여섯 시간 지속돼 ‘암증효과‘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즉 한낮에 건조가 이루어지고 밤에는 어체 내부의 수분이 외부로 퍼지면서 절로 숙성돼 부패되지 않는다는 게 그들의 자랑이었다.
“소금으로 섭간하는 게 특징“
법성의 굴비 골목을 찾았다. 기다랗게 굽은 좁다란 길 양편에 가게들이 어깨를 맞대고 있었다. 상회마다 갓 풀은 냉동조기를 세척하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칠산에서 잡은 조기냐“고 물었더니, 한 사내는 “부산에서 왔다“고 말했다. “우리가 최고니 사진 찍으려면 여기서 하쇼“라며 친절히 대했다. 중국산이 많이 수입된다는데, 저건 어디서 잡힌 조기일까? 덕장도 여간해선 구경하기 힘들었는데, 더러 기계로 건조하는 곳도 있다고 누군가 말했다. 굴비는 공기가 잘 통하는 그늘진 곳에 걸어 두어야 변질되지 않는다. 보름 이상 오래 두면 배에서부터 누런 기름기가 빠져 맛이 변한다. 영광지역의 경우 전통적으로 통보리 속에 묻어두고 먹었다. 굴비의 수분 함량은 약 20% 인데, 잘 마른 통보리 속에 한달 간 보관 후 관찰해보니 흡습 현상도 일어나지 않고 상온에서보다 품질이 좋았다고 한다. 일반 가정에서는 한 마리씩 비닐 봉투에 담아서 냉장고에 넣어두는 게 본래의 맛을 유지시키는 비결이다. 냉장 최적 온도는 영하 5~20℃. 영광 굴비의 정상적인 제조공정을 거치지 않았다면, 장기간 보관이 어렵다. 껍질은 그대로나 속이 물러 변질되기 때문이다. 소금으로 재운 섭간이 아니고 물간(물에 소금을 타서 절임)으로 염장했을 경우, 너무 짜고 단백질 등 영양분이 손실돼 맛이 떨어진다. 통보리 굴비의 경우 머리와 비늘을 제거한 후 찢어서 술안주나 밥반찬으로 먹는다. 짠 제품은 쌀뜨물에 10시간 정도 담가 두면 염분이 빠지는데, 이때 조리하면 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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