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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실의 의례와 생활 왕과 진상품, 백성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차려진 수라상
15-06-07 20:09

미암 유희춘은 조선 선조 때의 양반 관료였다. 그는 전라도 관찰사로 재직할 때 ‘헌근가(獻芹歌)’라는 시조를 지었다. ‘미나리를 바친다’는 뜻인데, 이런 내용이었다.

미나리 한 펄기를 캐어서 씻우이다. (미나리 한 포기를 캐어서 씻습니다.)
년대 아니아 우리 님께 바자오이다. (다른 데 아니라 우리 님에게 바치옵니다.)
맛이야 긴치 아니커니와 다시 씹어 보소서. (맛이야 좋지 않습니다만 다시 씹어 보소서.)

유희춘이 미나리를 바치겠다고 한 대상은 물론 선조 임금이었다. 유희춘은 왜 선조에게 미나리를 바치려 했는가? 자신을 전라도 관찰사에 임명한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였다. 이처럼 임금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신이 사는 곳의 특산물을 바치는 것이 진상이었다.
송강 정철 역시 선조 때의 양반 관료였다. ‘사미인곡’, ‘속미인곡’, ‘관동별곡’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정철은 ‘훈민가(訓民歌)’라는 노래도 지었다. ‘백성을 가르친다.’는 뜻의 노래로서, 삼강오륜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중 ‘군신유의’ 부분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님금과 백성과 사이 하늘과 따히로되
내의 설은 일을 다 알오려 하시거든
우린들 살진 미나리를 혼자 어찌 먹으리.

정철이 ‘우린들 살진 미나리를 혼자 어찌 먹으리 ’라고 한 것은 백성을 위해 고생하는 임금의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 소박하지만 자신이 사는 곳에서 나는 미나리라도 진상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즉 백성들이 진상하는 이유 역시 ‘내의 설은 일을 다 알오려 하시는’ 임금의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시대 양반들에게 왕은 충성의 대상이었다. 신하가 왕을 생각하고 충성을 맹세하는 것은 양반의 당연한 도리였다. 비록 왕에게 버림받아도 원망하지 않고 왕을 사모하며 충성을 맹세하는 것이 양반의 도리였다. 고려시대 동래출신 정서의 ‘정과정곡’이나 조선시대 정철의 ‘사미인곡’, ‘속미인곡’은 왕에게 버림받은 신하가 마치 버림받은 여인과 같은 심정으로 왕을 연모하는 노래였다. 신하가 왕을 연모하는 마음이 충성심이라면 그 충성심을 지역의 특산물로 표시하는 것이 진상품이었다.조선시대 양반들은 자신을 양반으로 임명해 준 왕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역의 특산물을 진상품으로 올렸다. 문제는 본인들의 돈으로 진상품을 마련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에게서 거두어 들여 마련했다는 사실이다. 결국 고생은 백성들이 하고, 생색은 양반들이 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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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상품은 궁궐에 올라가야 하기에, 최고의 품질로 고르고 골라 마련해야 했다. 그러니 진상품을 장만해야 하는 백성들은 말할 수 없이 고생했다. 여기에 더하여 진상품을 거두는 아전들의 행패가 심하여 고생은 더 컸다. 담당 아전에 따라 백성들의 생사가 결정될 정도로 진상은 중요했다. 이렇게 진상이 중요시된 이유는 진상이 왕권 이념과 직결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왕은 선출 왕이 아니라 세습 왕이었다. 그 같은 조선시대 왕의 정통성은 천명을 받아 조선을 개국했다는 태조 이성계에까지 소급되었다. 즉 조선시대 왕의 정통성은 궁극적으로 태조 이성계가 받았다고 하는 천명과 그 천명을 합법적으로 계승했다는 사실에 있었다. 그것을 확인시켜주던 국가 의례가 바로 종묘제례였다. 이 종묘제례를 통해 조선시대 왕은 자신이 합법적으로 천명을 소유했음을 주장할 수 있었고, 그것을 근거로 전 국토와 전 백성에 대해 왕토(王土)와 왕신(王臣)을 주장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 진상은 바로 왕토사상과 천명사상을 근거로 시행되었다.

진상에는 공상과 진상 두 가지가 있었다. 중앙의 각사(各司)를 통해 궁중으로 상납되는 것이 공상(供上)이었고 관찰사, 병마절도사, 수군절도사 같은 지방 관료들을 통해 직접 궁중으로 상납되는 것이 진상이었다. 공상과 진상의 종류에는 축일공상(逐日供上), 소선(素膳), 축삭공상(逐朔供上), 월령(月令), 사삭일개(四朔一改), 연례(年例), 남염침장침저(藍染沈醬沈葅), 탄일절일표리물선의대(誕日節日表裏物膳衣襨), 삭선(朔膳), 진하(陳賀) 등이 있었다. 이 중에서 월령과 삭선은 진상이었던 반면 그 외는 공상이었다.
  
축일공상은 말 그대로 매일 공상되는 물품이었고 축삭공상은 매달 공상되는 물품이었다. 소선은 장례나 제사 때의 고기를 뺀 음식물이었다. 사삭일개는 4개월에 한 차례 공상되어 바뀌는 물품이었고 연례는 1년에 한 차례 공상되는 물품이었다. 남염침장침저는 옷감을 물들이는 데 필요한 물감과 김장에 필요한 소금 및 채소를 공상하는 것이었다. 탄일절일표리물선의대는 왕이나 왕비 등의 탄신 또는 명절을 축하하기 위해 공상되는 옷감과 음식물 등이었다. 진하는 국가나 왕실에 경사가 있을 때 이를 경축하기 위해 공상되는 물품들이었다. 그런데 공상 물품에는 생산된 이후 오래 보관할 수 있는 물품도 있고 그렇지 못한 물품도 있었다. 오래 보관할 수 없는 물품은 생산되는 즉시 소비하지 않으면 쓸 수 없었다. 이런 물품은 특별히 공상하는 시기를 정해 놓았다. 예컨대 채소와 과일 등 보관상의 문제 그리고 제철음식이라는 측면이 강한 음식재료가 그 대상이었다. 조선시대 지방의 관찰사, 병마절도사, 수군절도사 등이 현지의 특산물을 궁중에 올리는 것이 진상이었다. 진상은 지방에서 궁중으로 올려야 하므로 매일 올린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므로 조선시대 진상은 월령이나 삭선처럼 한 달에 한 차례 올리는 것이 기본이었다.

진상의 주체가 명목상으로는 중앙 관서 또는 지방관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는 마을 단위의 백성들이 부담했다. 진상품이 생산되는 마을의 사람들은 진상품을 분담하여 거뒀다. 반면 진상품이 생산되지 않는 마을의 사람들은 각 호별로 분담하여 징수한 돈으로 진상품을 마련했다. 이렇게 마련된 진상품은 일단 마을 자체의 검사를 거쳐 군현으로 올라가고, 군현에서는 또 자체의 검사를 거친 후 감영 또는 도회소로 상납하였다. 감영 또는 도회소에서는 또다시 감사의 책임하에 진상품을 검사한 후 매달 궁중의 각 전궁으로 상납하였다. 공상과 진상을 통해 궁중에 상납되는 음식 재료는 사옹원에서 받아들였다. 경복궁이나 창덕궁의 경우 사옹원은 왕의 처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했다. 예컨대 경복궁의 사옹원은 궐내 각사가 밀집했던 경회루 앞 지역의 승정원 앞에 있었다. 창덕궁의 사옹원은 희정당 앞쪽에 있었다. 왕의 식사 및 궐내 음식물의 공급 등의 일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사옹원을 왕의 처소 가까이에 둔 결과였다. 사옹원의 엄격한 검수를 거친 음식 재료만이 궁중 요리사들에게 전해져 요리되었고, 그 요리들은 최고의 식기에 담겨 수라상에 차려졌다. 조선시대 백성들이 각 지역의 최고 특산품을 이용한 최고의 수라상을 왕에게 바친 이유는 ‘내의 설은 일을 다 알오려 하시는’ 임금의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만약 임금이 내의 설은 일을 다 알오려 하시지 않는다면 진상할 필요도 없다는 주장이 충분히 가능했다. 이런 점에서 조선시대 임금의 수라상은 내의 설은 일을 다 알오려 하시라는 백성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차려졌다고 할 수 있다.
                                                   한국문화재단홈페이지 글˚신명호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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