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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공주 공산성

역사가 숨쉬는 고장에 산다는 것은 그 자체로 큰 행복이다. 신라의 수도 경주, 백제의 수도였던 공주나 부여에 산다는 것은 비록 물질적으로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고도(古都)가 풍기는 문화적 향기가 자신도 모르게 삶을 윤택하게 하기 때문이다.

개발보다 환경보전을 우선하는 최근의 추세에 비춰 보면 더욱 그러하다. 지방화시대를 맞아 지역마다 옛 문화재를 복원하고 또 조그마한 근거만 있어도 ‘역사의 현장’으로 삼으려는 노력이 이를 입증한다.

금강이 유유히 흐르고 가까이 계룡산이라는 영산이 자리한 공주(公州)는 시쳇말로 공주처럼 타고난 행복을 간직한 도시다. 공주에는 백제의 화려한 문화를 한눈에 보여주는 무령왕릉을 비롯, 백제 이후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풍부한 사적을 간직한 공산성(公山城)이 자리하고 있다. 문화적 취향이 강한 사람은 ‘곰나루’라는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설렌다.

곰나루 혹은 고마나루가 공주의 첫 이름이다. 백제는 이곳을 웅천(熊川)이라고 했다. 백제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에게 한강변의 아차산성에서 피살되자 그의 아들 문주왕은 웅천으로 서울을 옮기고 웅진(熊津)이라고 했다. 문주왕 시절부터 성왕이 부여(사비성)로 천도할 때까지 63년간 웅진은 백제의 수도였다.

웅진 시절 문주왕과 그 뒤를 이은 동성왕 등은 개로왕의 원수를 갚기 위해 고구려와 수 차례 전쟁을 치렀다. 또 무령왕 대에는 일본에 오경박사를 보내 일본 문화를 개화시켰고 중국 양나라와 통교했다. 62세로 붕어한 무령왕은 왕궁이 마주 보이는 송산리 언덕에 유택을 마련했다. 1971년 무령왕과 왕비의 무덤이 처음 세상에 알려지면서 백제의 숨겨진 역사도 부활했다.

475년 백제 문주왕이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 1500년 동안의 역사를 말없이 지켜본 자리가 공산성이다. 흙과 석축으로 백제시대에 처음 축성된 공산성은 해발 110m의 분지형 야산에 골짜기를 따라 성을 쌓았다. 동서의 길이는 약 800m , 남북의 길이는 약 400m이고 둘레는 2660m다. 백제시대에는 웅진성으로 불렸고 고려시대에는 웅진의 이름이 공주로 바뀌면서 공주산성 혹은 공산성으로, 조선시대 인조 이후에는 쌍수산성으로 불리기도 했다. 현재 남아 있는 석성은 대개 조선시대 선조·인조 때 개축한 것이다.

공산성에서 처음 만나는 문이 서문이다. 물론 남문인 진남루를 통해 공산성에 오를 수 있지만 대개 서문을 이용한다. 서문 성루에는 백제의 군사(?)들이 도열해 있다. 이른바 왕궁 수비대라고 할 수 있다. 공주시가 주최하는 백제문화제 기간에 ‘웅진성 수문병 근무 교대식’을 거행, 관광객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서문은 1990년 복원한 것이다.

서문을 통과하면 여러 갈래의 길을 따라 원하는 코스를 택할 수 있다. 원시림은 아니지만 하늘이 보이지 않는 보도를 따라 역사의 향기를 만끽할 수 있다.

백제의 유적에 목마른 사람은 한걸음에 백제 왕궁터 발굴지로 향하면 된다. 백제시대의 유물이 일부 확인돼 왕궁터로 추정하는 데 무리가 없다. 다만 대백제국의 위용으로 보아 매우 협소하다는 아쉬움은 남는다. 왕궁터 앞에는 연못이 있다. 조경시설로도 볼 수 있는 이 연못은 왕궁에서 사용하는 물을 외부에서 길어다가 저장하던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구조는 지면을 깊게 파고 그 안에 자연석을 원형으로 쌓아 올렸다.

공산성 안에 정유재란의 흔적을 간직한 곳이 ‘명국삼장비’다. 이름 그대로 공주에 주둔했던 명나라 장군 3명의 업적을 기린 비다. 이 비는 선조 32년(1599) 처음 금강변에 건립했는데 이후 매몰돼 행방을 알 수 없다가 숙종 37년(1712) 당시 관찰사 송정명이 찾아내 공산성으로 옮겼다. 일제하 일본인들이 공주읍사무소 뒤뜰에 매립한 것을 광복 후 찾아내 현재의 자리에 세웠다. 비석 하나에도 한·중·일의 미묘한 관계가 스며 있어 교훈을 안겨준다.

공산성에서 현대사의 편린을 볼 수 있는 유적이 광복루다. 동쪽 가장 높은 위치에 자리한 광복루는 원래 해상루라고 해 성내의 중군영 문루였다. 일제가 중군영을 폐쇄하면서 현재의 자리로 옮겨 웅심각이라고 불렀다. 그 뒤 퇴락해 무너진 것을 광복 후 주민들의 힘으로 보수했고 1946년 4월 김구·이시영 선생 등이 이곳에 이르러 국권 회복을 의미하는 뜻으로 ‘광복루’라고 개명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웅진성의 누각이 임류각이다. ‘동성왕이 왕궁지 동쪽에 건립하고 신하들과 연회를 가졌다’는 기록을 근거로 1980년 발굴에 나서 당시 흔적을 찾아냈고 1993년 백제식 건축양식으로 복원했다.


포인트-무령왕릉
웅진성, 충남 공주 공산성에서 곰나루로 나가는 언덕이 송산리 고개다. 고개 북쪽으로 아담한 옛 무덤·고분들이 자리하고 있다. 조선왕조나 신라의 왕릉보다 규모가 작아 왕릉이라기보다 이 지방 족장들의 무덤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곳 송산리 고분이 바로 백제 왕릉이라는 것은 무덤 중 하나가 무령왕의 무덤으로 확인되면서 의심의 여지가 없게 됐다.

광복 후 고고학계의 최대 사건으로 꼽히는 백제 무령왕릉의 발견은 실로 우연한 일이었다. 1971년 송산리 제5, 6호 고분의 침수 방지를 위한 배수로 공사를 하던 중 입구가 노출돼 발굴에 착수했다. 발굴 결과 이 능의 주인이 백제 25대 무령왕과 왕비임이 확인됐다.

송산리 고분군에서 무령왕릉의 발굴은 백제의 웅진 천도와 당시 중국과의 교역관계, 또 백제의 문화와 사상을 한눈에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이다. 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은 석조물, 목제품, 금·은 제품, 청동기류, 도기류 등 108종 2906점으로 이중 국보로 지정된 것만도 12종 17점에 달한다.


가볼 만한 유적지-우금치 동학혁명군 위령탑
1894년 10월 동학혁명군은 서울을 목표로 북으로 진격하던 중 충청 감영이 있는 공주에 이른다.
공주 감영이 바라보이는 우금치 고개에서 동학혁명군은 관군·일본군의 연합군과 접전하게 된다.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농민군의 싸움은 처음부터 이미 승패가 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1주일 동안 피아간에 벌어진 전투는 일본군은 물론 관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저들이 무슨 힘으로 저토록 무섭게 버티는가”라고 할 만큼 농민군은 1주일 동안 기세등등한 싸움을 전개했다.
그러나 결국 일본군의 신식무기 앞에 10만 대군이 무너지고 겨우 1000명 정도만 살아서 후퇴했다. 동학혁명군의 대참패였다.

우금치 전투에서 산화한 영령들을 위로하기 위해 1973년 11월 천도교 공주교구에서 이 일대를 정화하고 위령탑을 세웠다. 폭정과 외세의 침략에 항거하던 민족혼이 이곳에 잠들어 있다.


먹거리-무공해 채소 쌈밥

공산성에 오르면 시간가는 줄 모른다. 특히 한여름 곳곳에 드리워진 그늘 속에 들어가면 금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자장가가 돼 더욱 발길을 묶어놓는다. 시간을 잊으면 배고픔도 사라지는 법. 그러나 금강가에 자리한 임해전에 오르면 잊었던 허기가 되살아난다.
이때 성을 내려오면 대로변에 자리한 신식(?) 음식점들이 손짓한다. 공산성 앞에는 쌈밥집이 유난히 많다. 이는 공주 인근에서 나오는 무공해 채소가 값싸게 공급되기 때문이다.

유기농으로 재배한 채소 30~40여 가지와 돼지고기 수육, 독특한 쌈장과 영양이 풍부한 돌솥밥이 어우러진 쌈밥은 한여름 입맛을 돋운다.
언론인 최영주 기자 < sunworker@hanafos.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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