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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조선다운 궁궐 창덕궁
15-03-29 11:41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창덕궁에 호랑이가 나타나 사냥을 했다는 기록이 몇 차례 보인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최근에도 2006년 야생 멧돼지가 창덕궁에 출현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 창덕궁이 산과 연결되어 있어 산짐승들이 출몰한 것이다. 창덕궁은 자연 지형에 맞추어 산자락에 지어진 궁궐로 우리나라의 지형에 맞게 발달된 가장 한국적인 스타일의 궁궐이다. 조선(1392~1910)의 궁궐 창덕궁은 고려(918~1392) 궁궐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의 송악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고려 궁궐터인 만월대를 보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70% 이상이 산지로 이루어져 있는 한반도 지형의 특성상, 우리 민족은 조상 대대로 산과 인연을 맺고 살아왔으며 산자락에 집을 짓고 생활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궁궐은 임금과 그 가족들이 생활하는 임금의 집이기도 하고 임금과 신하들이 나랏일을 논의하던 국정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 궁궐은 왕조의 존엄성과 권위를 과시하는 국가의 상징물이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궁궐과 같은 존엄성과 권위를 중시하는 상징적 건축물은 인위적으로 설정된 하나의 축에 의해 질서정연한 배치를 보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는 조선의 또 다른 궁궐인 경복궁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창덕궁은 인위적인 축이 없다. 당시 유행했던 중국 궁궐의 전형에 얽매이지 않고 북악산의 줄기인 응봉의 산자락 생긴 모양에 맞추어 적절하게 궁궐의 기능을 배치했다. [b]임금님이 가장 선호한 궁궐 [/b]

공식적으로 조선의 으뜸 궁궐은 조선 왕조의 출범과 함께 1395년 곧바로 창건된 경복궁이다. 창덕궁은 조선의 제3대 임금인 태종 5년(1405)에 지어진 조선의 두 번째 궁궐이다. 궁궐의 화재나 전염병 등 천재지변으로 경복궁을 사용하기 어려운 유사시에 경복궁을 대신하기 위한 것이 원래의 목적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역사를 살펴보면 창덕궁은 오히려 경복궁을 제쳐두고 주로 사용된 실제적인 으뜸 궁궐이었다. 이는 시대 상황과 함께 조선 임금들의 개인적인 취향과도 관계가 있다. 조선 중기에 발생한 임진왜란(1592~1598)으로 인해 서울에 있던 모든 조선의 궁궐들이 불타버렸다. 전쟁이 끝난 후, 경복궁은 그 터가 좋지 못하다는 이유로 방치된 반면, 창덕궁은 곧바로 복구되어 1868년 경복궁이 다시 중건될 때까지 조선의 으뜸 궁궐로 사용되었다. 임진왜란 전에도 경복궁과 함께 창덕궁이 빈번하게 사용되었는데 이는 평지의 경복궁보다 산자락에 위치한 창덕궁이 산에 살아온 ‘유전인자’를 지닌 조선 임금들에게 좀 더 편안했기 때문이다. [b]사색의 공간을 겸비한 궁궐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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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은 국정을 논하는 정부청사인 동시에 임금의 일상을 담아야 하는 생활공간이었다. ‘만 가지나 되는 일’이라 뜻으로 만기萬機라 할 만큼 임금이 처리해야 할 일은 격무였다. 이에 따라 임금은 심신을 새롭게 할 휴식과 사색의 공간이 필요했다. 더욱이 임금의 일상은 항상 궁궐에 한정되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창덕궁의 뒷동산인 후원은 이러한 임금의 필요에 부응하기 위해 조선 초기부터 궁궐의 창건과 함께 조성되었다. 신비하다고 하여 흔히 ‘비원秘苑 Secret Garden’으로 일반인과 외국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창덕궁 후원은 창덕궁 면적의 약 2/3를 차지할 만큼 넓다. 그 속에는 산과 계곡에 정자와 연못이 더해지고 어우러져, 깊은 산속 같기도 하고 곧 신선과 선녀가 나올 법한 신선의 세계 같기도 하다. 조선의 임금들은 국정에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 후원을 거닐며 시를 짓기도 하고 때론 신하들과 활을 쏘며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기도 했다. 또한, 겨울에는 후원의 높은 봉우리에 올라 눈 구경을 하고 시를 남겼다. 이렇듯 창덕궁 후원은 조선 임금들의 인간적이고 예술적인 체취가 흠뻑 배어있는 감성의 공간이었다. 지금의 창덕궁을 보고 옛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500년 이상 영위된 조선의 영광을 품었던 창덕궁은 일제강점기(1910~1945)를 거치면서 크게 훼손되고 말았다. 후원은 어느 정도 옛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창덕궁 전각 중 원래의 것을 꼽으라면 손가락에 꼽을 정도에 불과하다. 이는 1830년대의 창덕궁 모습을 보여주는 동궐도를 보면 확인할 수 있다. 다행히 1990년대 중반부터 창덕궁 복원이 시작되어 지금은 원래 규모의 35% 정도 회복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1997년에는 창덕궁의 독창성이 높게 평가되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됨으로써 창덕궁은 이제 인류의 문화적 자산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출처 : 문화재청 홈페이지   글_ 최종덕 문화재청 국제교류과장 사진_ 김홍기, 이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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