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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의 왕위찬탈로인안 단종애사의 여인들
15-05-10 16:32

세조의 왕위찬탈은 정치적으로는 왕권강화를 통해 중앙집권체제를 공고히 수립하였지만, 한편으로는 그 과정에서 도덕적인 흠이 존재했기에 단종을 위해 목숨을 내던진 충신들의 미담이 지금껏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단종애사에서 ‘충신들’에 미처 가려진 ‘여인들’은 없을까요?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했던 그녀들의 파란 많은 삶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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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혜빈 양씨는 세종의 후궁으로 단종의 서조모(庶祖母)에 해당하는 인물입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 친부모를 여읜 단종을 위해 고군분투한 여인이었습니다. 1452년, 고작 열두 살에 즉위한 단종은 그 ‘뒷배’가 든든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경우 어린 왕을 대신해 모후가 수렴청정을 행합니다만, 당시 왕실사정은 이마저 여의치 않았죠.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는 출산 직후 산욕열로 3일 만에 승하하였고, 할머니 소헌왕후 역시 할아버지 세종보다 앞서 승하한 지 오래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단종의 혈기왕성한 삼촌들은 지나치게 유능하고 야심이 많았습니다. 혜빈은 고립무원의 단종에게 어머니 이상의 애정을 쏟아 붓습니다. 그녀는 어머니를 잃은 단종에게 젖을 물리기 위해 자신의 둘째아들을 품에서 떼어 유모에게 맡기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운명은 혜빈의 편이 아니었고, 결국 그녀는 세조가 단종의 보위를 찬탈하자 이를 저지하다 교수형에 처해집니다. 그녀의 아들들도 어머니와 동일한 행보를 보이는데, 특히 셋째아들 영풍군(그의 장인은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년입니다.)은 동복형 한남군, 이복형 금성대군(세조의 친동생)과 함께 단종복위에 가담하여 세조와 대립하다 사육신의 난이 실패로 끝나면서 어머니와 함께 유배되고, 종국에는 유배지에서 살해됩니다. 혜빈의 묘는 숙종의 명으로 대대적인 수색을 했음에도 발견하지 못했으며, 지금까지도 그 위치를 알 수 없습니다. 현재 혜빈의 위패는 큰아들 한남군과 함께 충주시의 사당에 배향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를 알고 나면 성주의 문화재 하나가 눈에 띄는데, 세종대왕의 아들들의 탯줄을 안장한 세종대왕자태실이 그것입니다. 이곳에는 혜빈의 세 아들들을 비롯해, 그녀의 정적이었던 세조와 그녀가 한평생 지키고자 했던 단종의 태실이 한곳에 모여 있어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과거에는 아이의 태반과 탯줄을 항아리에 넣어서 명당에 묻어두면 그 아이가 무병장수한다고 믿었습니다. 이 때문에 조선 초기 왕실에서는 국왕과 왕자들의 태를 항아리에 담아 전국 명당에 안치해 왕권의 안정과 번영을 기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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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실 앞에는 누구의 것인지를 알리는 빗돌을 세워두는데, 세조는 단종복위에 가담한 금성대군, 한남군, 영풍군, 화의군, 그리고 계유정난 때 죽은 안평대군의 태와 빗돌들을 파헤쳐 산 아래로 내던집니다. 1975년에야 겨우 찾아내 다시 세운 것이 현재에 이르렀다고 하네요. 이 때문에 다섯 왕자의 태와 빗돌은 없거나 깨진 채로 다른 태와 같이 안장돼 있습니다. 한편 세조의 빗돌은 비문이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본디 세조가 즉위하자 예조판서 홍윤성이 세조의 태실 앞에 ‘세조대왕 가봉비문’을 써서 빗돌을 건립했습니다. 그러나 시대의 승자는 세조임에도 민심은 그의 편이 아니었는지, 삼촌의 왕위찬탈을 손가락질한 백성들이 이 빗돌에 오물을 붓고 돌로 갈아 훼손했다고 합니다.  
  
 정순왕후 송씨는 단종의 정비로, 1453년 간택되어 이듬해 열다섯 살의 나이로 조선의 국모가 됩니다. 실권 없던 단종이 세조에게 양위하여, 골육상쟁은 그 종말을 고하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단종복위 사건이 연달아 발생하여 상황은 점차 정순왕후에게 비극적으로 치달았습니다. 1457년 그녀는 노산부인으로 강등되어 영도교에서 단종과 눈물의 이별을 합니다. 이 어린 부부는 이후 다시는 재회하지 못해, 그들이 생이별한 장소였던 영도교는 영이별다리, 영이별교, 영영건넌다리라고도 불렸습니다.
 소녀왕비는 궐에서 쫓겨나 지금의 숭인동 동망봉 기슭에 시녀 셋과 초막을 짓고 ‘업보를 씻는다.’는 의미로 정업원이라 이름 짓습니다. 그러던 와중 정순왕후의 아버지 송현수가 교수형에 처해졌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본디 그녀의 아버지 송현수는 세조의 오랜 친구였습니다. 1456년, 사육신이 단종복위를 도모하다 실패하자 송현수는 대간의 처벌요구를 받았지만 세조의 두둔으로 무사한 적도 있었죠. 그러나 이듬해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이 또다시 단종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자 이번에는 세조도 묵과할 수만은 없었고, 송현수도 모역죄로 주살당한 것입니다. 불행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해 10월, 그녀가 무사 기원했던 어린 남편도 사사되지요. 한순간에 남편과 친정을 잃은 그녀는 동망봉에 올라 단종의 유배지였던 동쪽을 바라보며 통곡했습니다. 동망봉이란 명칭은 정순왕후가 동쪽을 바라본다는 뜻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여인의 한은 여인이 안다 했던가요. 소녀왕비의 한 맺힌 울음에 마을 아낙네들이 함께 가슴을 치며 슬픔을 나눴는데, 이 통곡을 ‘동정곡’이라 합니다. 정순왕후를 위로해 준 것은 왕도, 사대부도 아닌 그들이 천대한 민초, 그것도 여인네들이었습니다.  
 
종로구에서는 23일부터 사흘간 숭인동 동망봉과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등지에서
정순왕후의 추모문화제가 개최되었다.                                            ⓒ박종일
 
 
  정순왕후는 끼니를 잇기가 어려워 시녀들이 동냥해온 음식으로 연명하고 염색업을 하며 어렵게 생계를 이어갔는데, 이에 마을 여인들이 줄지어 푸성귀를 그녀에게 전해줍니다. 이것이 세조의 귀에 들어가자 금지령이 내려졌고, 마을 아낙네들은 조정의 감시를 받지요. 그러자 이 여인들은 8세 이상 사내의 출입을 금하는 금남(禁男)시장을 조직해 정순왕후의 집으로 음식을 건네줍니다. 현재 그 근처에 ‘여인시장 터’라고 새겨진 비석이 남아 있습니다.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는 정순왕후의 소식은 세조에게도 유쾌한 소식이 아니었을 겁니다. 세조는 영빈정이라는 집을 지어 곡식을 하사했으나 그녀는 끝끝내 거부했습니다. 그의 도움을 받고 돌아설 여인이었다면 동망봉에 올라 수십 년간 단종을 위해 통곡하지도 않았겠지요.
 정순왕후는 82세까지 장수하며 한없는 오욕의 세월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세상인심이 참으로 변화무쌍하여, 그녀가 묻힐 땅 한 뙈기 내놓으려는 이가 없었습니다. 세조의 왕위찬탈 당시 많은 신하들이 분개했지만, 대대적인 숙청으로 사육신과 금성대군 등 많은 이들이 희생당하자 누구하나 나서기를 꺼린 것이지요. 이에 정순왕후의 시누이의 시가, 즉 단종의 누나 경혜공주의 시가 해주 정씨에서 나섭니다. 정순왕후는 경혜공주의 아들 정미수에게 후사를 부탁하고 승하하여 정씨 문중의 묘역에 잠들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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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릉은 비공개지역이지만 학술연구 및 현장답사, 교육 등의 목적으로 관람을 원하는 방문객은 사무실에 신청하면 입장할 수 있다.
 
훗날 이 비운의 왕후는 숙종 때 단종과 함께 복위되는데, 본래 능으로 결정되면 주위의 묘들을 이장시킵니다. 그러나 숙종은 예외적으로 정씨 문중이 정순왕후의 제사를 봉향한 공이 있다하여 그대로 둘 것을 허락합니다. 때문에 지금도 그녀의 주위에는 정씨 문중의 묘역이 남아 있지요. 정순왕후가 평생 단종을 생각했다 하여 이름 지어진 사릉(思陵)은 가장 애달픈 능호가 아닐까 합니다.
  
 경혜공주는 문종과 현덕왕후의 장녀로, 단종의 누나입니다. ‘공주(公主)’의 어원은 본디 중국 황제의 딸을 혼인시킬 때 ‘삼공(三公)’이 ‘주관(主管)’했기에 생긴 단어입니다. 이는 공주가 그만큼 귀한 사람이었음을 의미하지요. 그렇다면 조선시대 공주의 삶은 어땠을까요? 최고 권력자인 왕과, 전국의 처녀들을 대상으로 시행된 간택에서 최종 선택된 중전의 딸이 조선의 공주였습니다. 또한 후궁의 딸은 옹주로 불렸으며, 앞서 언급한 공주와 함께 품계를 초월한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내명부가 아닌 외명부에 속해 있었습니다. 어려서 궁중에서 자란 뒤 궐 ‘밖’으로 시집가기 때문에 외명부에 속한 것이지요. 왕녀들은 혼인 후 시집살이를 하더라도 시부모에게 절을 하지 않았습니다. 시부모와 왕녀의 자리 또한 어떠한 경우에도 왕녀가 상석(上席)에 앉는 것이 법도였지요. 왕녀는 요절한 경우가 많았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부마는 법적으로 재혼을 할 수 없었습니다. 축첩이 금지되었던 건 당연하고요. 또한 시가가 대역죄를 지어 몰락한 경우에도 왕녀의 신분은 보장됐습니다. 이처럼 왕녀들은 일반 사대부 여성들보다 훨씬 우대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왕녀라는 신분 덕분에 늘 특권을 누린 것은 물론이고, 경제적으로 엄청난 혜택을 누렸으며 잘못을 저질러도 반역이나 불충과 관계된 일이 아니라면 형벌을 받는 일도 드물었습니다. 어찌 보면 왕자보다 왕녀의 삶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드는군요. 세자를 제외한 왕자들이 왕권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이유로 정치활동을 금지당한 채 살아야만 했고, 걸핏하면 역모 죄에 연루되어 제거되었던 것에 비하면 말이죠.
 이처럼 왕녀로서 평탄할 것만 같았던 경혜공주의 삶은 세조의 왕위찬탈로 뒤틀리기 시작합니다. 세조는 조카 단종의 보위를 찬탈하고, 경혜공주의 남편 정종(鄭悰)을 능지처참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운명을 따라 그녀도 순천부의 관비로 전락하지요.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두 잃고 극귀(極貴)의 신분에서 천민으로 곤두박질친 셈입니다. 극도로 비참한 상황에서 경혜공주는 딸을 임신 중이었습니다.  

숙모전. 충남 공주시 동학사 경내에 위치하며, 단종과 단종복위에 가담한 충신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경혜공주의 남편 정종(鄭悰)의 위패도 안치되어 있다. 충남문화재자료 67호.
ⓒ문화재청
 
그러나 그녀는 관비로 있는 동안에도 공주 특유의 기품을 잃지 않았다 합니다. 순천부사 여자신이 관비의 사역을 시키려 하자, “나는 왕의 딸이다. 비록 죄가 있어 귀양을 왔지만 수령이 어찌 감히 나에게 관비의 사역을 시킨단 말이냐?”라고 호령해 부리지 못했다고 해요. 훗날 세조는 왕비 정희왕후의 충고를 받아들여 경혜공주를 한양으로 불러들입니다. 죄책감을 느꼈던 삼촌은 조카딸의 작위를 되찾아 주었고, 아이들도 면천됩니다. 그녀의 딸은 요절했지만, 아들 정미수는 중종반정에 공을 세워 정국공신에 임명되지요. 정미수는 죄인의 자식으로 관리가 되었다 하여 여러 차례 탄핵을 받았으나, 정희왕후와 성종의 비호 아래 연좌제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정미수는 단종의 비 정순왕후의 양자가 되어 제사를 봉향했으며, 현재 그의 묘는 사릉(思陵) 지척에 있습니다. 
 
경혜공주의 묘는 고양시에 위치해 있습니다만, 변변한 표지판 하나 없어 쉽사리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한 나라의 왕녀로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그녀의 마지막 안식처가 너무도 쓸쓸했습니다.
                                            제2기 문화재청 대학생 블로그기자단 심정연(isjy5@hanmam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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